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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를 May 12. 2020

펭수, 이 대안적 콘텐츠의 가치

한 달쯤 전이던가, BTS 팬이던 지인이 말했다. –나 이제 펭수로 갈아탔어. ‘갈아타다’라는 표현을 쓰다니, 펭수라는 존재가 그토록 열성적이던 아이돌 덕질을 가히 대체할 만한 무엇이라는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그는 부산에서 열린 펭수 팬사인회, 아니 펭사인회에 자차를 몰고 다녀왔다. 그 사이 펭수의 인기는 이렇게 줄곧 덕질할 대상을 찾아 헤매는 이들뿐만 아니라, 기존 팬덤 문화에 익숙지 않던 타깃들에게까지 널리 뻗어나간 듯 하다. 4050세대가 주요 청취자인 MBC 라디오 <여성시대>에 게스트로 초대되는가 하면, 구성원 불문 온갖 단체 카톡방에서는 펭수 이모티콘의 커다란 동공이 불쑥 불쑥 나타난다. 이 정도면 이 새삼스러운 인형 탈의 성공은 과연 연구 대상이다.


뽀로로 같은 ‘우주대스타’가 되기 위해 남극에서부터 헤엄쳐 오다가 스위스에 들러(?) 요들송을 배웠고, 참치와 빠다코코넛을 좋아하며 잠은 소품실에서 자는 10살의 EBS 연습생 펭수. 언뜻 굉장히 단편적이고, 치밀한 기획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배경 설정이지만 한 순간 대성한 아이콘들에게 어디 그런 것이 필요하던가. 어떤 특정 계기로 떴는지와 무관하게 이 지속적인 인기 가도에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시사점이 있다.


먼저 전통 미디어들의 다양한 뉴 플랫폼 진입 양상에서 이 EBS <자이언트펭TV>라는 콘텐츠가 보여준 고유의 행보다. 기존 TV 방송국에게 새로운 시류에 뛰어들어 살아남는 일은 불가피한 선택이 된 지 오래다. 몇 해 전 MBC <마이리틀텔레비전>의 성공과 SBS 모바일 콘텐츠 플랫폼 <모비딕>의 안정적인 런칭에 힘입어 방송사들은 줄지어 뉴미디어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한계점도 보였다. CJ E&M 나영석 사단의 <신서유기>는, 시즌 초반 네이버TV에서만 서비스되는 인터넷 방송으로 출범했지만 출연진은 여전히 강호동, 이수근, 은지원과 같이 지상파를 틀기만 하면 나오는 기성 예능인들이었다. 최근 인기 있는 JTBC 산하 스튜디오 룰루랄라의 <워크맨>도 본래 TV가 안방이던 아나운서 장성규를 전면에 내세운다. 주류 남성 예능인들로 가득한 브라운관에 피로감을 느끼며 ‘탈(脫)TV’한 시청층에게는 전혀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EBS는 크리에이터를 꿈꾸는 초등학생들을 타깃으로 펭수라는 전에 없던 인물을 유튜브 채널용으로 창조해냈다. 기존 레거시 미디어(Legacy media)에서 노출된 적 없는 신선한 캐릭터가 활약한다는 점은 스브스뉴스의 <문명특급>과 유사하다. 최근 펭수와 <문명특급>의 진행자인 연반인 (연예인과 일반인의 합성어) ‘재재’가 만난 에피소드는 전통 미디어의 인프라를 최대한 뽑아먹는(?) 뉴비(Newbie)들의 비밀 작전 같았다. “펭수야 너 언제 프리 선언 할거니?”, “일은 돈 받는 만큼만 하는 거야.”와 같은 대화들에선, 휘몰아치는 변화의 기류 속 경계선에 서 있는 방송업계 종사자들과 제작진의 자조(自嘲)가 엿보인다. 그리고 이들이 젊고 지혜로운 방식으로 협업하며 또 다른 대안적 콘텐츠를 창출하고 있는 광경은 그 자체로 ‘볼 만한 것’이다.


두 번째는 펭수의 무성성(無性性)에서 오는 캐릭터적 가치다. 펭수는 이상형이 무엇이냐고 묻는 인터뷰 질문에 ‘나 자신’이라고 답했으며, 여자친구도 남자친구도 없다고 말한다. 목소리로 미뤄보아 남성 연기자가 펭수의 탈을 뒤집어 쓰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펭수 자체는 무성적 존재로 그려진다. 이 무성성은 곧 무해함으로 이어진다. 몇 해 전 제일기획에서 라이선스 사업을 했던 <부즈클럽>의 고릴라 마스코트 ‘아둥가’는 이성을 밝힌다는 점이 캐릭터의 주된 특성 중 하나였다. 한동안 제일기획 사옥 앞에 있던 초대형 아둥가 조형물에는 남성 보행자와 여성 보행자를 식별해 각기 다른 멘트를 내보내는 기능이 주입돼 있었다. 남자에겐 면박과 무례함을, 여자에겐 픽업 라인(Pick up line)과, 역시 무례함을 들려줬다. 결과적으로 인기 캐릭터로 자리잡지 못한 패인에는 여러 요소들이 작용했겠으나, 주요하게는 아둥가의 명백한 섹슈얼리티가 당초 타깃이었던 20대 여성들에게 소구되기는커녕 장벽으로 작용한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승리나 정준영의 팬덤들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누군가의 팬이 되기를 자처한 이들에겐 이제 무해한 치유의 아이콘이 필요하다. 한편 펭수의 ‘성(性) 중립성’은 EBS 콘텐츠로서 일면 교육적이기까지 하다. ‘여자애가 얌전히 앉아야지’, ‘사나이는 우는 게 아냐’와 같이 성 고정관념을 강화시키는 현실과 전통 미디어의 억압 속에서, 이로부터 자유로워 보이는 펭수의 행동은 소중하다. 연출자인 이슬예나 피디와 매니저(?) 박재영 피디는 펭수를 아이 취급하면서도 존대어로 말하고, 특정 성별을 가진 상대로 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한 번 안심한다. 펭수도 ‘(면접) 결과 빨리 알려주세요! 그래야지 저도 MBC를 가든 KBS를 가든 할거 아니에요!”나 “내가 힘든데 힘내라고 하면 힘이 납니까? 그러니까 저는 힘내라는 말보다 ‘사랑해’라고 해주고 싶습니다.”와 같은 멘트로 이 시대 청년의 답답함을 폭넓고 안전하게 대변하며 맞받아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펭수가 누군가의 페르소나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벌써부터 펭수를 사칭하며 불법 굿즈를 팔거나 개인 정보를 수집하는 이들 때문에 제작진이 골머리를 앓는가 하면, 펭수 탈 속의 인물 정보도 유출되어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자이언트펭TV>는 앞으로 더더욱 많은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단지 ‘펭수 역’을 맡고 있는 그 실체가 가진 정체성, 혹은 가치관은 지금 이 시점에서 정말 궁금하지만 동시에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아니, 모르는 게 나을지 모른다. 우리는 펭수 그 자체로 위로 받고 있기 때문이다. 펭수의 앞날은 영원히 펭수만의 그것으로 남기를 바란다.


20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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