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이 주말 보낸 이야기
오늘 만난 내 동기들과 나는 20대 청춘에 산에 다닌 인연으로 일 년에 두세 번 얼굴을 본다.
젊은 노인축에 드는 나이가 됐어도 얼굴을 보면 형제를 만난 듯 그냥 반갑다.
몸은 늙어도 마음이 늙지 않아서 가끔 인지부조화를 실감하고 혼자 웃게 된다.
고창 운곡람사르습지 저수지 옆에 유스호스텔이 있다.
우리는 다섯 동기가 거기서 하루 자고 가까운 산에 다녀오기로 했다.
이 약속을 잡아두고 핸드폰 일정표에는 기록하지 않았던가 보다.
우리 언니들하고 또 약속을 했다.
일요일에 우리 집에 와서 팥죽을 끓여 먹자고.
지난 동지 때 약속했다가 깨지는 바람에 아쉬움이 남아서 기어코 또 약속을 잡았다.
이삼일 지나서 난 뭔가 개운치 않고 어긋난 것 같은 기분에 일정을 확인했다.
아이고! 일정이 중복이다.
어떻게 해결하나.
언니들은 어렵게 맞춘 약속날이다.
또 깰 수 없다.
산동기들에겐 내가 집밥을 해주겠노라 장담을 해 두었다.
멀리서 오는 친구들도 있는데......
이렇게 하자.
토요일 하룻밤은 동기들과 보내고 일요일엔 일찍 출발해서 집으로 오자.
언니들은 점심때 오니까 크게 무리는 없다.
내가 산행만 포기하면 해결될 문제니까.
금요일에 집밥차릴 장을 보았다.
삼겹살, 각종채소, 양념, 술, 생수.....
숙소에 준비돼 있겠지만 몇 가지 주방도구도 챙겼다.
토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시금치나물과 알배추 나물을 만들었다.
늦은 아침 혼밥을 먹고 여유롭게 커피도 마시고 집안을 한 바퀴 둘러보고.
큰 장바구니 두 개에 준비물을 나눠 담고 룰루랄라 출발했다.
한 시간 반을 운전해서 유스호스텔에 도착했다.
규모는 작아도 비교적 최근(2020)에 지어진 숙소라 외관도 주변도 깨끗했다.
혼자서 잠깐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 건너 운곡저수지의 윤슬이 눈부시게 반짝거린다.
홍가시나무 생울타리엔 빨갛게 새잎이 돋아서 참새부리같이 귀엽다.
오후 3시에 동기들이 도착했다.
한 사람은 부득이 못 오게 되어 우리 일행은 넷이다.
2층 숙소에 들어가서 짐을 풀었다.
일사불란하게 착착 식탁을 차리다가 난 머리에 쥐가 났다.
준비는 완벽한데 고기가 없다.
김치냉장고에 따로 넣어 두었던 고기를 안 챙긴 것이다.
여유만만하던 나는 앗! 작게 소리를 질렀다.
염치 불고하고 친구 둘을 심부름 보냈다.
굽이굽이 산 길을 달려간 두 친구가 고기를 사 왔다.
식탁에 삼겹살, 된장찌개, 나물, 김치 두 가지, 쌈채소......
건배를 하고 나서 한 친구가 조심스럽게 내게 말했다.
"뇌영양제를 먹는 게 어때?"
난 그 친구말에 동의했다.
우리들은 밥과 술을 먹으며 그것에 대해 토론했다.
이른 저녁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나갔다.
저수지를 따라 걸었더니 운곡람사르습지가 나왔다.
난 예전에 두 번 이곳을 다녀간 적이 있다.
우리는 공원내부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해 질 무렵 운곡생태공원 입구에서 주변의 산들을 둘러보았다.
검은 산의 실루엣 위로 흰 초승달이 떴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도 밤의 공기 중에 아름답게 가지를 뻗고 서있다.
곧 어두워진 길로 우리는 되돌아왔다.
난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하기 때문에 걷는 길은 오늘 한 시간 산책이 전부였다.
또 식탁에 둘러앉았다.
두 번째는 술상이다.
동태전과 팽이버섯전에 몇 순배 잔이 돌고 우리는 꿀잠을 잤다.
누룽지로 아침을 해 먹고 숙소정리를 마치고 난 짐을 싸서 돌아왔다.
동기들은 얕게 눈 쌓인 선운산 산행사진을 보내왔다.
계획했던 방장산은 출입통제라고 선운산을 다녀간 것이다.
언니들이 바리바리 싸들고 들이닥쳤다.
찰밥을 짓고 큰 새우 넣고 시래기 찜을 해 온 큰언니,
오이고추하고 진간장을 들고 와서 장아찌를 담가주는 둘째 언니,
팥을 쪄서 갈고 쌀가루를 장만해서 낑낑 들고 온 셋째 언니,
운전해 주고 딸기 한 박스 들고 쫄래쫄래 따라온 셋째 형부까지.
우리 식구들은 못 말린다.
어디를 가든 번쩍번쩍 음식 장만을 해버리니까 웬만해선 식당에 가서 만족할 수가 없다.
들통에다 팥죽을 쑤느라고 마지막에 살짝 눌려서 언니들이 혼비백산 난리가 났다.
내 살림에서 큰 솥, 큰 소쿠리는 다 나왔다.
수제 팥죽을 한 사발씩 드시고 커피도 한잔씩 드시고 정리가 좀 되었다.
언니들이 돌아가고 혼자가 되어서야 나는 큰 숨이 쉬어졌다.
정신을 가다듬고 뒷정리를 마저 한 다음 침대에 누웠다.
아직 낮시간이지만 쉬어야겠다.
정말 예전 같지 않다, 힘에 부친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주말 보내기가 이렇게 버거워서야 원!
***고창 운곡 람사르습지는 자연의 놀라운 회복력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생태 공원이다.
1982년 영광한빛원자력 발전소 건설당시 용수공급을 위해 대규모 저수지가 조성됐다.
9개 마을 156 가구가 터전을 떠나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진 이곳은 자연스럽게 습지가 되었다.
논밭이 있던 자리에는 수양버들이 휘늘어지고 이끼가 흙을 덮어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다.
다양한 수종, 나비와 새, 반딧불이등 총 830여 종의 동식물이 함께 살고 있는 생태의 보고다.
람사르 습지란, 1971년 인도 람사르에서 채택된 협약으로 우리나라엔 26개소가 지정돼 있다.
독특한 생물지리학적 특성, 희귀 동물 서식지, 물새 서식지로 중요한 습지를 보존하기 위해 지정한 곳이다.
운곡습지는 2011년 지정되었다. 고창은 2013년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도 지정됐다.
*참고 ; 고창운곡람사르 습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