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는 가까워질수록 편협해지고 멀어질수록 공평해진다

영의 자리 (고민실)

by 꿈에 날개를 달자

반복되는 하루가 예측 가능한 일상을 만든다. 예측 가능한 일상이 선사하는 평온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61)

관계는 가까워질수록 편협해지고 멀어질수록 공평해진다. (219)


사는 게 모두 힘들다고 말한다. 이렇게 힘든 세상. 유령처럼 사는 건 어떨까? 있지만 없는 듯. 존재감을 발산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존재감이 있다는 건 능력이 있거나 뭔가 자신이 있어서 아닐까? 삶이나 인생에 대해?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그런 청춘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취직이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근데 생각해보면 IMF가 터진 이후부터 청춘들에게 취직이 쉬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도 그랬다. 나의 20대도 매사 힘들고 어려웠다. 내가 잘 살고 있는지 고민했고,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는 것인지 고민했다. 취직하고는 그냥 다녔다. 설계사무소에 다녔으니, 밤새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몸이 힘들어 생각하는 건 사치였다. 그냥 일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예측 가능한 일상이 선사하는 평온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그때는 몰랐던 것 같다.


소설의 주인공 ‘나’는 이름조차 소개되지 않은 20대다. 다니던 직장에서 정리해고당하고 이직한 회사에선 폐업으로 백수가 되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나는 무엇이든 되어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채용 사이트에서 발견한 약국에 취직한다. 나이, 성별, 학력, 경력 무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자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일. 면접 자리에서 약국의 국장 김 약사는 나에게 ‘유령이 왔네’라고 말한다. 그렇게 나는 기꺼이 유령이 되고 조 부장에게 일을 배운다. 비슷한 약 이름을 외우고 처방전을 입력하고 약을 정리하고 약 조제하는 일을 돕는다. 다양한 손님을 맞이하며 ‘나’는 한때 친했지만 멀어진 ‘혜’와의 관계를 생각한다. 또한, 일하며 조금씩 친해진 조 부장이 있지만, 그 이상의 친밀함을 곁에 두지 않는다. ‘나’는 이곳에서 어떤 상황을 맞이하고 어떻게 시간을 보내게 될까?


20대의 청춘이 혼란스럽듯 중년인 나도 인생이 혼란스럽다. 때론 유령처럼 존재감 없이 조용히 살고 싶을 때도 있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조용히. 관계는 때론 지나치게 에너지를 쓰게 되고, 정신적으로 피곤함을 느끼게 된다. 단지 관계뿐일까? 정리되지 않은 미래도 우리를 힘들게 한다. 유령 같은 20대가 지난 들, 30대, 40대가 편안할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삶은 고민과 선택의 연속이니까. 그나마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왜 세상은 예전보다 살기 좋아졌다고 하는데 왜 사는 게 힘들까? 지금보다 더 나이를 먹으면 사는 게, 편안해질까? 조금 더 마음을 내려놓는다면 사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게 될까?


주인공 ‘나’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아무것도 정해진 것 없는 일, 그리고 한때 친했다고 생각했던 친구와의 멀어짐.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상황이나 여건이 관계를 지속할 수 없게 하는 것. 오직 취직만 생각하고 산다면 그래도 조금은 편했을까? 관계만 생각하고 산다면 그래도 괜찮을까? 인생은, 한 가지만 고민하며 사는 직진이 아니라 더 고달프고 힘들다. 다양한 관계를 생각해야 하니까. 우정, 정규직 취직, 그리고 취직하지 못한 부모의 잔소리, 타인이 바라보는 유령 같은 20대의 청춘. 어느 것에도 자유롭지 못하기에 주인공 ‘나’는 인생이 버거웠을 수도. ‘1’이 되고 싶지만 되지 못한 ‘0’들의 인생.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인생이 실패는 아닐 텐데 우린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심지어 부모조차도. 어디에도 마음 둘 곳 없는 청춘은 그래서 더 외로웠을까?


1이 되지 못한 세상 모든 0에게 전하는 조용한 응원. 책 뒤편에 써진 문장에 고개를 끄덕인다. 내 아이들도 20대이기에 남의 이야기 같지 않다. 내 아이들 또한, 자신의 인생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니까. 쉬운 인생은 없다. 아이들에게 선택지를 많이 줄 수 있는 부모가 되고 싶지만 나도 내 노후가 걱정이다. 한시도 경쟁이 없던 시대에 살지 못한 아이들. 성공한 것이 돈만 많이 버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생에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지 아이들과 함께 고민해 주는 부모가 되고 싶다. 그리고 꼭 1이 되지 않으면 어떤가? ‘다른 숫자에 기댈 때 영은 우주의 단위가 될 수 있습니다.’ (책 뒷 표지) 0이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살 수도 있을 텐데. 우리의 인생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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