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살이
서귀포를 아시나요 / 서명숙
'서귀포를 아시나요'
두 달 살이 제주면 충분할 줄 알았다. 충분하지는 않아도 아쉬움 없는 일정은 꾸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다. 내 둥지에서 멀미를 한다. 수상가옥에 사는 이들이 육지를 밟으면 멀미를 한다더니 내가 딱 그러하다. 곶자왈이나 난대림의 빼곡한 숲을 거닐던 다리는 아스팔트에 몸서리를 치고 온갖 수풀 냄새로 시큰하던 코 끝에선 건조한 아파트 화단이 심심하다. 그러자니 찾아지는 게 도서관이다. 어제도 한 보따리 제주를 이고지고 와 책상 위에 부려놓으니 쳐다보는 마음이 따뜻하고 좋다. 그중의 한 권이다.
섬에서의 탈출을 꿈꾸던 '서명숙 만물상'의 딸, 서명숙이 도시를 탈출하여 다시 제주로 돌아온 이야기가 담담하게 이어진다. 사실 시기적으로 나와 차이가 크지 않는데 1956년에 서귀포에서 태어난 그녀의 삶 속엔 우리의 현대사가 깊숙하게 박혀있다. 출생의 서사가 남달라서 드는 생각일 수 있다. 최남단 서귀포의 여자와 함경도 춥디추운 무산의 남자, 지역적인 조합도 예사롭지 않지만 이들은 미혼모와 인민군 포로라는 결점을 인연의 매개로 혼인에 이르렀고 그 사이에서 그녀가 태어났다.
책의 초입에서 만난 이 정보만으로도 서명숙 이사장이 올레길을 만들 운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나고 자란 엄마의 땅인 서귀포와 평생을 함경도 말투로 살며 절절한 그리움을 토해내던 아빠의 땅, 무산. 사는 내내 길이 숙제였을 것만 같다. 막힌 길 저 끝에 살고있는 아버지에게 무산을 찾아주고 싶었으리라. 제주 엄마 길을 잇고 무산 아빠 길까지 잇고 싶으리라. 그런데 이 책의 마지막 챕터에 실제로 이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행보들이 담겨 있어서 작가의 생각을 읽어냈다는 동류의식과 더불어 뭉클한 감동을 만났다.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최남단 서귀포에 살면서 최북단 함경도의 추위를 그리워했던 남자, 서귀포의 습하고 더운 날씨를 몸서리치게 싫어했던 남자, 그는 변방의 섬 '제주'에서 또 다른 '섬'이었는지 모른다. 본문 148쪽
아버지가 서귀포에서 가슴에 품고 있던 바다는 고향 함경도 무산이었을 것이다. 그곳에 두고 온 그리움이라는 아버지의 바다. 서귀포에서 무산까지 나는 길을 내어 가려 한다. 본문 308쪽
그녀를 실제로 만난 적이 있다. 한 달 전쯤, 아카자봉(올레센터 프로그램)을 통해 올레 1코스를 걷고 있을 때였다. 앞서 걷던 자봉샘의 환호성이 들리는가 싶더니 누군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는 우리를 향해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그와의 만남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를 내포하는 자봉샘의 상기된 표정에서 사적인 인연을 넘어 우리 모두와 관련이 있는 분인가 보다 짐작되었다. 그러나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행색은 거친 보헤미안이었다. 두건 사이로 자유분방하게 삐져나온 곱슬머리, 개량한복인 듯한 헐렁한 차림에 레이어드 된 니트, 무엇보다 지중해 해변에서 막 걸어 나온 듯 태양의 열기 그대로인 까만 피부, 범상치 않았다. 나와는 어떤 쪽으로도 인연의 교집합을 기대할 수 없는 포스였다. 그런 그녀가 서. 명. 숙. 제주올레 이사장이었다.
우연과 필연의 순환, 올레길을 알게 된 이후 무수히 들었던 이름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안에 그렸던 초상 그대로였다. 개척자의 야생성이 살아있는 여전사, 눈빛이 살아있는 여전한 현역이었다. 이사장의 직함으로 살아온 시간이 십수 년인데도 초심자의 뜨거움을 지켜내고 있음에 큰 감명을 받았다. 길을 낸 사람과 그 길을 걷는 사람, 결이 비슷한 우리의 만남은 하하 호호, 그녀는 일일이 손을 내밀어 악수하고 "놀멍 쉬멍 걸으멍" 덕담도 건네고 사진에도 함께 하는 소탈함으로 매력을 한껏 고조시키고는 기자단을 이끌고 떠났다. 나의 올레길 걷기가 CNN에 등장하는 건가, CNN에서 올레길 취재를 요청해 직접 안내하고 있다고 했다. 기자들을 향해 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며 우리를 소개하는 그녀의 낭랑한 영어에 한 번 더 반해서는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제주가 우리의 제주가 되고 그녀의 올레가 우리의 올레가 되는 마법의 선구자, 작은 체구가 산처럼 느껴졌다.
나의 두 달이 얼마나 풍요로웠는지, 올레길을 걸으며 내가 얼마나 깊어지고 단단해졌는지, 감사한 마음이 얼마나 큰 지 달려가 전해주고 싶었다. 맨해튼이 한창 도시로 확장을 거듭할 무렵 채석장, 돼지농장, 무단 입주자들의 판자촌이 대부분이었던 센트럴파크 부근을 현대화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그때 누군가가 개발 대신 공원을 지으라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지금 이곳에 공원을 만들지 않는다면 100년 후에는 이만한 크기의 정신병원이 필요할 것이다. 어느 쪽이 더 현명한 일이냐라며. 그렇게 해서 조성된 미국 최초의 도심공원 센트럴파크는 지금껏 빌딩 숲속에 사는 뉴요커들의 오아시스가 되고 있다. 깨어있는 한 사람이 일군 위대한 역사가 초석이 되어 세상 곳곳에 도심 공원들이 들어서 쉼을 제공하고 있다. 그 속에 우리의 올레길이 있다. 어머니마저도 허황된 일이라며 말리던 일을 무려 437km에 달하는 27개 코스 올레길로 완성해 내는 집념. 이제는 모름지기 세계인이 찾는 치유의 공간이 되었다.
그녀가 묻는다. 서귀포를 아시나요, 아니요.
다시 가야 할 것 같다. 다시 걷게 된다면 서귀포에서부터 걸어야겠다. 그녀가 들려주는 서귀포 이야기가 너무 재밌다. 그녀가 애정하는 걸매생태공원, 칠십리 시 공원, 자구리공원, 서복공원, 정모시공원, 그 어디쯤 그녀의 벤치에서 그녀의 또다른 이야기를 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