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가는 먼 집 / 허수경

독주가 생각나는

by 운고

혼자 가는 먼 집 / 허수경


불취불귀(不醉不歸)

(불취불귀 :취하지 않았으니 돌아갈 수도 없다.)


어느 해 봄그늘 술자리였던가

그때 햇살이 쏟아졌던가

와르르 무너지며 햇살 아래 헝클어져 있었던가 아닌가

다만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은 없다


마음들끼리는 서로 마주 보았던가 아니었는가

팔 없이 안을 수 있는 것이 있어

너를 안았던가

너는 경계 없는 봄그늘이었는가


마음은 길을 잃고

저 혼자

몽생취사하길 바랐으나

가는 것이 문제였던가, 그래서

갔던 길마저 헝클어뜨리며 왔는가 마음아


나 마음을 보내지 않았다

더는 취하지 않아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길이

날 묶어

더 이상 안녕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나

더 이상 안녕하지도 않았다


봄그늘 아래 얼굴을 묻고

나 울었던가

울기를 그만두고 다시 걸었던가

나 마음을 놓아 보낸 기억만 없다




<혼자 가는 먼 집>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기차는 간다>


기차는 지나가고 밤꽃은 지고

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

오 오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

내 몸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먼저 닮아 있었구나


허수경 작가 / 교보문고


유구무언이다.

작가를 이해하려는 생각부터 내려놓는다.

독자로서 읽을 뿐, 어느 한 문장 온전히 다가갔다 말할 수조차 없다. 삶의 결을 풀어낸 단어들이 제 몸값 이상의 처연함으로 자리하니 문장마다 그 감정이 몇 배로 휘몰아쳤다. 오랜만에 독한 시집을 만났다.


내 가슴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작품들 몇 편을 옮겨보았다. 어떤 작품은 첫 행부터 숨이 턱 막혔다. 도대체 무엇이 이 작가의 심장을 난도질한 것일까 궁금함이 드는 작품도 있었다. 숨죽이고 읽고 읽으니 몇 소절은 나의 명치를 파고들고 아픈 추억도 소환했다.


이 시집은 한 번에 다 읽으려 해 선 안될 것 같다. 서가 한편에 세워두고 생각나는 날 꺼내 술과 함께 읽어야 생채기 없이 온전히 읽어 내려갈 수 있을 시집이다. 욕심도 내려 놓고 시간도 내려놓고 취한 눈으로 읽어야 한다. 시집이라기보단 삶의 소용돌이가 녹아있는 소설책 같기도 하고 막다른 골목 선술집 벽에서 우연히 발견한 고수의 선문장 같기도 하다. 슬픔도 허락되지 않은 절망을 이야기하고 용서가 부끄러운 참회도 절절하다.


독주가 생각나는 이여, 이 시집을 읽어 보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