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사람 / 하정우

기도

by 운고


걷기를 즐기는 나

걷기를 좋아하는 나

그러자니 지나칠 수가 없었던 서가의 한편

"걷는 사람, 하정우"


제목이 그럴싸하군.

쓰윽 목차 정도 살펴보고 내려놓으려 했다.

목차를 살피고 한 장을 넘겨 서문을 읽고 그리고 본문을 읽어가다 의자를 찾아 앉았다. 계속 읽고 싶었다. 그냥 이리저리 걷고 있다는 단순한 고백서인데 왜 나를 끌어당기지, 나도 걸으면 되잖아, 오기도 부려보고 반항도 해 보지만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그의 이야기들. 한 남자의 열정과 뚝심으로 적어낸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단단했다. 앉은자리에서 절반을 읽고 대여를 해 왔다.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죽을 만큼 힘든

시점을 넘어 계속 걸으면,

결국 다시 삶으로 돌아온다.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조금 더

걸을 수 있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걸어 나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기를


요즘 나는 기도할 때

내 소원을 열거하지 않는다.


그저 신이 내게 맡긴 길을

굳건히 걸어갈 수 있도록

두 다리의 힘만 갖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삶은 그냥 살아나가는 것이다.

건강하게, 열심히 걸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삶에서 해볼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그저 부지런하게 갈 뿐이다.


걷기는 이 점이 마음에 든다.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떻든

내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걷기는 내가 살아있는 한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길을 걸으면서 나는

잘못된 길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 더 더디고 험한 길이 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길 끝에서 느낀 거대한 허무가 아니라

길 위의 나를 곱씹어 보게 되었다.


그때 내가 왜 하루하루 더 즐겁게 걷지 못했을까

어차피 끝에 가서는 결국 아무것도 없을 텐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휴식을 취하는 것은 다르다.

나는 휴식을 취하는 데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적어도 일할 때처럼 공들여서 내 몸과 마음을 돌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한겨울 오후 5시 무렵 걷는 것을 좋아한다.

이 시간을 나는 걷기의 '매직아워'라 부른다.

매직 아워는 원래 촬영할 때 많이 쓰는 단어다.

여명기나 황혼기에 햇빛의 양이 적당해서

아주 아름답고 부드러운 영상을 직을 수 있는 시간대를 가리킨다.

아마 이 시간대에 하늘을 올려본 적이 있다면

왜 매직 아워라 부르는지 이해할 것이다.


길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길 위에서 만난 별것 아닌 순간과 기억들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


한때 나는 열정을 잃어버린 느낌을 받았다.

나 자신을 추스르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 갈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걷는 것.

내 보폭을 알고 무리하지 않는 것

내 숨으로 걷는 것

걷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묘하게도 인생과 이토록 닮았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나에게 남은 것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일과

기도뿐이라는 사실





프로포폴 불법 투약으로 벌금형을 받은 하정우. 이유를 막론하고 마약 사건에 연루된 것만으로 나에겐 불편한 연예인이다. 책 속의 하정우와 마약 불법 투약 하정우는 때론 맞고 때론 다른 사람인가 싶다. 오늘은 책으로 만났으니 책 속의 하정우에서 마무리한다면 그는 멋진 남자, 하정우였다. 걷는 사람, 하정우.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한다. 배우, 화가, 감독, 시나리오 작가 등 재능 부자가 각각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지혜도 담겨 있고 무엇보다 이 책의 주제인 걷기에 욕심을 내고 싶게 만드는 멋진 책이다.


걷기를 중심축으로 살아가는 퇴직자가 되고 보니 한 문장 한 문장이 더더욱 진심으로 다가왔다. 두 다리에 힘 있음에 감사하며 열심히 걸어야겠다는 각오를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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