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두달살이 1
퇴직의 날개를 달고 벌이는 두 번째 살풀이, 제주살이!
직장을 박차고 나와 제일 먼저 시도했던 필리판 어학연수, 무모했기에 가능했던 도전에 고무되어 올해의 버킷은 내 나라 제주에서 두달살이를 해 보겠다고 짐을 챙긴다. 작년 필리핀에 비하면 가볍기 그지없다. 대단한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다. 익숙을 벗어던지는 것으로 충분했다. 직장의 울타리, 그 경계 밖 자유로움을 만끽하리라.
아들과 함께 했던 북유럽의 여행에서 우연히 출근 시간의 지하철 풍경을 마주했다. 어깨를 포개어 밀집해 있던 이들이 지하철이 정차하자 속사포처럼 튕겨나갔다. 절박함과 노곤함이 가득한 얼굴과 빠른 걸음, 여행을 떠나오기 전 나의 모습이 저러했으리라. 하물며 이 순간까지도 '짧지만 알찬' 일정을 소화하느라 스스로를 혹사하고 있던 참이었으니.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아들은 내려야 할 정류장을 예고하며 하차 준비를 재촉했지만 한 사람 한 사람 이리보고 저리보고, 바쁨에서 열외인 사람을 헤아려보았다. 있었다. 짧은 셔츠에 반바지, 등에 맨 배낭이 장기여행자임을 말하고 있는 젊은 친구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소란스럽지 않게 유쾌함을 나누고 있었다. 엄마를 이끌고 있는 아들은 지하철노선안내에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미간에 두 줄 주름이 깊게 파였다. 그런 아들에 짐이 될까 아들의 호흡까지 읽을 태세인 나의 긴장감은 말해 무엇하리.
그날의 지하철 풍경은 불쑥불쑥 나를 찾아들었다. 여행은 여행답게, 여행스럽게!
분, 초단위의 일정표를 내려놓고 일상처럼 편안하게, 그러자니 횟수를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2박, 3박의 간질맛 나는 여행기간을 가능한 한 길게, 조금씩 사치를 부리니 여행이 느슨해지고 넉넉해지고 가벼워졌다. 퇴직도 했겠다, 제주에 맘껏 사치를 부려보려한다.
두 달, 제주!
두 달이면 충분할까.
2,3년 전에 올레길을 절반 정도 걸었다. 남은 열세 개의 길을 마무리 짓겠다고 생각 중이다. 그리고 오름과 숲길을 가만가만 걸어 보려 한다. 나는 걸음이 꽤 빠른 편이다. 속도감을 즐기는 성향 탓이기도 하고 근육 맛에 길들여져 이왕지사 걸으려면 탄성 있게 걸어야지 하는 마음이다. 빠른 걷기도 나름 충분한 즐거움이 있다. 하지만 이번 제주는 운동을 우선하는 걷기가 아닌, 제주의 호흡으로 걸어보려 한다. 성난 게처럼 걷기는 성난 출근길로 충분하다. 시간이 남아도는 퇴직자의 제주살이인데 무엇이든 충만해야 하지 않겠는가. 젊었을 땐 씹어 먹을 각오로 덤비지만 우리 나이는 두 달에 제주 못 씹어 먹는다. 다음에 와야 할 명분을 남기는 것도 지혜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제주에서 읽으면 남다를까 싶어 들고 왔다. 다시 읽으며 '제주 4.3길'을 걸어보리라. 그 아픔을 이고 걸으면 맘만큼이나 몸도 무겁겠다. 그래도 기억하고 있다고 인사는 드려야지.
이제 시작이다.
숙소도 낡고 울퉁불퉁 머뭇거리게 하는 일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제주에 있고 소망했던 일을 시작했다. 그 걸음은 제주의 햇살을 따라 너울너울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