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묵자흑(近墨者黑)과 근주자적(近朱者赤), 간송 전형필

간송미술관에는 어떤 보물이 있을까? / 김민규 / 토토북

by 운고


어린이도서연구회의 일원이 된 지 일 년여, 이번 주는 발제자의 중책을 맡아 간송 전형필 선생에 관한 토론을 이끌어야 한다. 연초에 2026년도 전반기 생각 나눔 책에 ‘간송 전형필'이 선정되는 순간, 10여 년 전, 간송미술관 관람을 위해 새벽 기차를 탔던 날, 입장을 기다리는 길고 긴 행렬은 그 순간을 대비해 들고 간 잡지 한 권을 다 읽고서도 끝나지 않았고 막상 들어가서도 비좁은 공간을 가득 채운 군중들 사이를 곡예하듯 파고들어 신윤복의 미인도, 겸재 정선의 명화들을 아슬아슬하게 영접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날의 설렘으로 그날의 목마름을 채워볼 요량으로 발제자에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저요!

간송 전형필은 1906년 서울의 종로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5살엔 경술국치, 중학생 시절엔 삼일운동을 지켜보던 질곡의 성장기를 거치지만 다행히도 배오개 장터(종로 시점)에서 미곡상을 운영하며 조선의 3대 부자라 불릴 만큼의 큰 부를 이룬 그의 집안 덕에 삶은 넉넉했다. 아흔아홉 칸의 가옥과 800만 평에 이르는 광활한 토지는 현재의 가치로는 6,000억 원에 이르렀다 하니 담장 안의 햇살만큼은 따스했으리라.

그러나 들여다보면 어느 집이나 걱정거리 하나는 보듬고 산다는 옛말대로 부족할 것 없는 만석꾼 집에도 손이 귀한 아픔이 있었다. 작은할아버지도 작은아버지도 후사를 잇지 못하여 큰댁의 둘째 아들을 각각 양자로 삼았다. 간송이 작은아버지의 양자로 가게 된 이유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조부모님을 비롯한 집안 어른들과 친형마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24살의 청년은 집안의 유일한 남자, 유일한 상속자가 된다. 난세에 만석지기 재산을 감당하기엔 어린 나이, 수많은 유혹이 있었을진대 그가 붙잡은 건 감사하게도 우리의 문화재였다.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가 되어 어려움에 처한 우리 민족에게 힘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여 일본 와세다 대학의 법과를 졸업했지만, 일본법으로 잘못을 묻는 일이 내키지 않아 번민하고 있던 그때, 우연히 인연이 인연을 더하며 위창 오세창 선생을 만나게 된다. "우리의 문화재가 다시는 훼손되거나 반출되지 않도록 누군가는 지켜야 하네."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듯 눈이 부셨다, 어쩌면 인연이 이렇게 쌓이지. 근묵자흑(近墨者黑)과 근주자적(近朱者赤), 책을 좋아하는 그의 곁에 더 깊이 책을 사랑하는 이가 나타나고, 그림을 좋아하는 그의 곁에 그림을 더 잘 아는 이가 더해지는 해운. 위창 오세창 선생을 비롯하여 사촌 형 박종화 선생, 고등학교 스승이었던 이희동 화백, 한남서점의 백두용 선생, 그리고 문화재 수집에 손과 발이 되어주었던 이순황과 신보 기조. 환상의 ONE TEAM!

우리 것의 소중함에 매료된 이들이 뜻을 모아 사위어가던 우리의 문화재에 이름을 찾아주고 보화각에 울타리를 만들어 지금에 이르게 한 여정이 경이롭고 감사하다. 사람이어서 가능한 일, 인연의 방향성을 생각하게 된다.


위창 오세창 선생은 3.1 만세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며, 서화 대수장가였던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수장품을 바탕으로 1928년 역대 서화가들의 이전 기록을 총정리한 책을 출판했다. 그는 이 귀한 책들을 흔쾌히 문화초년병에 내놓는다. <근역서화징(역대 화가들의 인명사전)>, <근역화휘(191인의 그림 작품 251점 모음집>, <근역서휘(서예가 62명의 글씨 모음집)>'를 보고 또 보며 감식안을 키워냈던 간송에게 이 책은 문화 교과서가 되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 한남 서림의 백두용 선생이다. 그는 고문서와 출판계의 별이었다.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귀한 자료는 물론 한남서림까지 통째로 내어주면 간송의 문화재 구출 작전에 전진기지를 선물했다. 위창의 감식안과 백두용의 한남서점, 그리고 이순황과 신보 기조의 정보력이 간송의 여정에 올라타지 않았다면 지금의 간송미술관이 가능했을까. 돈이 있는데 어렵겠냐고 생각할 수 있으나 생각보다 돈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일 때가 있다. 단단한 인연에 돈이 거들었다는 생각이다.

그들이 심폐 소생시킨 문화재들이 어마어마하다. 보물과 국보가 마흔 점이 넘는다. 그중 가장 압권은 '훈민정음해례본'이다. 지구상에서 사용되는 언어 중 기록을 가진 '언어'는 한글이 유일하다고 한다. 조선어말살 정책을 추진되던 위험한 시국임에도 목숨을 담보한 간절함으로 구입 보존한 결과,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영예를 얻었다. 또한, 예순여섯 마리의 학이 날아오르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과 조선 후기를 가늠할 수 있는 혜원풍속도첩, 이외에도 1만여 점이 넘는 문화재들이 그의 손을 거쳐 우리에게 왔다, 간송미술관을 모르고서는 우리의 미술사를 연구할 수 없다고 할 만큼 학계에서도 소장품의 높은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당시 8칸 집 한 채가 1,000원(현재가치 3억 추정) 정도였는데 훈민정음은 1만 원, 청자상감운학문매병 2만 원, 혜원풍속도는 2만 5천 원에 구매했다, 도자기 한 점에 60억? 진품이요 명품이라는 확신이 든다 해도 그 금액에서는 주저했을 것 같다. 도자기의 가치로만 따진다면 배팅할 수 없는 가격이지만 문화재를 지키는 비용으로 본다면 감당해야 할 금액임이 맞다. 그는 사적인 판단을 내려놓고 비장하고 간절하게 한 작품 한 작품을 살려냈다. 늦은 위로지만 토닥토닥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고 싶다. 그렇게 지켜낸 문화재들은 지금에 와서 몇백 배의 가치로 그의 이름을 빛내고 있다. 문화재는 '무가지보(無價之寶)'라 하여 가격을 매기지 않기에 정확한 가격을 알 순 없으나 간송미술관의 훈민정음해례본은 1조 원 이상의 가치를 가졌다고 하니 간송의 업적을 어찌 가벼이 읊조릴 수 있으리오. 변호사가 되어 민족의 어려움을 도와주라는 아버지의 유지를 몇 곱절로 받들어 낸 참 잘난 아드님이 되셨다. 멋진 어른의 삶을 올곧게 사셨다.

첫 독서에서는 그의 재산 규모에 압도당했고 다시 읽을 때는 일제 식민 시민에게도 문화재를 지킬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시대의 조선인 부자에게는 일제의 편에 서서 돈 장난을 하거나 독립운동의 후원자가 되는 정도의 선택지가 있으려니 생각했는데 해방에 이르기까지 그의 위험한 애국이 별 탈 없이 이어졌다. 그 시절에도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는 인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개스비의 소장품을 이동할 땐 전세기를 이용해 도자기의 안전을 도모했다는 걸 보면 일제도 기개 있는 부자에겐 선이 있었지 싶다. 대한제국의 ’ 메디치 가문‘이지 않는가. 피렌체의 ’ 메디치 가문‘ 못지않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참된 부자, 이상범, 노수현 화백 등 당대의 작가들을 후원함은 물론, 우리의 문화를 지키는데 앞장섰던 간송의 시간을 나는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어쩌면 윤봉길, 서재필선생과 나란히 서계셔야 할 분인데 그는 독립 운동가의 명단에 오를 수 없었다. 수형기간도 없었고, 1937년, 방호단 국방헌납금 1만 원을 납부한 기록이 동대문서 납부처에 남아있단다. 이런 연유로 그의 행적이 느린 걸음으로 알려지게 된 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발제에 용기 내기를 잘했다. ‘간송미술관’의 유명세를 탐하러 갔던 10년 전의 방문도 헛걸음은 아니었다. 간송 선생의 행적을 되짚어가는데 그날의 풍경, 그날의 소회가 큰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책에 깊숙이 몰입할 수 있었다. 발제자의 책임감으로 지난주에는 간송 대구미술관을 찾았다. 긴 줄도 없고 한산한 미술관이 밋밋하긴 했지만 빛을 최소화한 현대적인 전시장은 간결했고 관람 동선도 여유로웠다. 전시장의 품격이 작품의 품격에 맞닿아 있는 듯하여 안심되었다. 성북동 간송미술관은 비좁고 전시장들도 낡아 보존에 불안감이 있었는데 그 옆에 새로운 수장고를 짓고 있다니 이 또한 감사한 마음이다.

간송미술관의 보물(금동여래입상과 금동보상입상)과 국보(금동계미명삼존불, 금동삼존불감) 경매 등 여러 걱정스러운 뉴스들이 있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오래된 과제였던 수장고와 상설 전시관인 대구 간송미술관을 개관하는 등 연구 보존과 전시에 균형감을 추구하는 노력들이 엿보여 다행이다. 작품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간송미술관이 안정감과 귄위를 하루빨리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 책이 아이들에게 닿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아이가 행복하게 자라려면 그 아이의 가정뿐 아니라 마을 전체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의 아이들에겐 어른보다 학원과 미디어가 더 가까워서 어른에게 뭔가를 배울 시간이 없다. 미디어에 물들어가는 아이들에게 간송을 소개하고 싶다. 어른의 부재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책이요, 간송 선생 같은 기개 있는 어른을 만날 수 있는 길도 책이다. 인연이 닿아 근묵자흑(近墨者黑)과 근주자적(近朱者赤), 그의 삶에 물들어 가기를 권하고 싶다.

제대로 산다는 게 뭔지 한 수 배웠다. 간송 전형필, 묵직하게 살아낸 그의 시간에 존경을 바친다. 내 마음에 저장, 그에게 깊이 물들었나 보다. 우리 것을 찾게 된다. 7월에 열리는 간송 특별전시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