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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정 Nov 10. 2020

못하는거? 없어요

  엄마는 나를 세상 최고의 어린이로 만들었다. 항상 말했다. “공주, 네가 잘나면 어디서도 누구도 너한테 뭐라고 할 사람 없어.” 지금부터는 하나뿐인 딸을 잘난 사람으로 만든 쓰리잡 엄마의 위대한 노력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한다. 부끄럼 많은 딸은 유치원이 끝나면 문화센터의 구연동화 수업에 갔다. 처음 본 사람들 앞에서 뒤로 숨어버리는 나를 위해서였다. 덕분에 지금은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도 MC역할을 할 수 있다. 또, 집중력이 없는 것 같다며 바둑교실을 다니기 시작했다. 엄마는 나의 바둑실력을 더 높이겠다며 고학년 수업에 참여시켰다. 하얀돌과 까만돌을 놓는 시간, 그게 다였다. ‘저 바둑돌이 잘못해서 목으로 넘어가 버리면 어쩌지?’하는 귀여운 걱정을 하다보면 수업이 끝나있었다. 여자아이들이라면 한 번 쯤 할 법한 발레 수업도 받았다. 꽤 오래 하다보니 발레발표회에 나가야 한다고 했다. 큰 대회도 아니었다. 그저 부모님들께 보이는 재롱잔치 정도였다. 그 어릴적부터 쳤던 피아노 콩쿨도 떨린다며 나가지 않았던 나는 당연히 발레 발표회도 나가지 않겠다고 울며불며 못하겠다고 했다. 그 선언을 마지막으로 발레 수업은 더 이상 나가지 않게 되었다. 


  초등학교 입학 후 처음으로 받아쓰기라는 걸 했다. 내 이름을 5살 때부터 쓸 정도로 한글도 빨리 뗐지만 엄격한 우리 담임선생님은 마침표를 하나도 찍지 않은 난에게 0점이라는 점수를 줬다. 반의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이 0점을 맞았다. 물론 처음을 잘 가르쳐주고 싶은 선생님의 깊은 생각이셨겠지만 말이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서로 0점이라며 깔깔대며 집어와 엄마에게도 보여줬다. 엄마는 딸의 0점에 충격을 받아 매일 집에서 받아쓰기가 시작되었다. 덕분에 지금 맞춤법 하나는 자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교육열은 끝이 없었다. OMR카드가 뭔지도 모를 8살, 한자 시험 급수 따기에 나섰다. 당당히 상장까지 받았다. 한자가 싫다는 나에게 엄마만큼 열정적으로 재능교육 한자선생님 덕분에 지금도 간단한 한자 정도는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동네의 가게 사장님들이 나를 보며 말했다. “소정아~ 너 신문에 나왔다~” 속독학원 광고지에 내가 실렸단다. “책이 좋아요” 였나? 아무튼 그런 제목으로 말이다. 그 광고지는 우리집 유리문을 장식했고 햇빛에 종이가 누래질때까지 자리를 보전하다 사라졌다. 그래서 친척들이 모여 밥을 먹을 때마다 애정하는 나의 사촌들은 항상 고통받아야했다. “너도 책좀 읽어라.” 등의 잔소리로 말이다. 또, 나를 아는 친구들의 엄마는 그 광고지를 보고 학원에 등록하기도 했다. 내가 그 때 진짜 책이 좋아서 “책이 좋아요.” 라고 말을 했었는지, 학원 선생님을 따라서 열심히 다녔었는지, 책을 많이 읽는 원생에게 주는 상품 때문에 경쟁하면서까지 책을 읽었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체력도 중요하게 생각하던 엄마는 주말이면 주말체육, 평일에는 고학년이 될 때까지 수영 강습도 다니게 했다. 그 덕분에 학창시절 내내 운동도 잘하는 학생이 될 수 있었다. 예술 분야도 빼 놓을 수 없었다. 원래 다니고 있던 피아노 학원 원장님께서 멀리 이사를 가신다며 학원을 정리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다니게 된 새 피아노 학원에는 다른 악기를 배우는 친구들도 많았다. 선생님 한 명이 그 악기를 모두 다루는 게 멋있어 보였던 나는 선생님의 애총으로 플룻 수업을 몇 번 받았다. 엄마가 일하고 있던 길 건너 당구장으로 가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엄마, 나 플룻 사줘.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엄마는 어찌어찌 유명한 회사의 플룻을 사줬고, 열심히 배웠다. 덕분에 나는 적어도 두 악기는 다룰 수 있는 어린이가 되었다. 미술학원에 다니고 싶다는 나의 말 한마디에 엄마는 나를 데리고 당구장 근처의 화실에 데려갔다. 선생님을 잘 만나 매 끼니를 함께하며 그림을 그렸다. 입시생들만큼 오랫동안 학원에 있었다. 물론 나는 절반의 시간동안은 수다 떨기에 전념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깨너머 배운다고 고등학교 졸업때까지 미술대회 상장은 꼭 받았다.      


  그렇게 나는 뭐든 잘하는 사람이었고, 잘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노력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치른 진단평가에서도 꽤 높은 등수를 차지했다. 그래서 우리학교에서 운영하던 특별반 수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0교시, 8교시에 30명이 모여 수업을 더 하는 것이었다. 엄마는 그런 내가 대견하다며 학교까지 차로 10분 거리를 매일 태워줬었다. 차에서 10분 동안 간단히 먹을 도시락까지 준비했었다.      


  자, 엄마의 노력은 끝나지 않았지만 내 자랑은 여기서 끝이다. 아침잠이 많던 나와 내 옆자리를 항상 함께하던 친구는 말 그대로 수업시간마다 닭이 모이를 먹듯 졸았고 당연히 그 결과 다음 학기 시험에서는 빛의 속도로 특별반에서 떨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이만하면 됐지.’ 라는 정신승리 덕분인지 별로 타격감은 없었다. 그렇게 점점 공부보다 더 재밌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라마에 빠지고, 아이돌도 좋아해보고 밤을 새워 축구경기도 보면서 여느 여고생들의 학창시절보다 훨씬 더 재밌는 학창시절을 보냈다. 재미와는 별개로 성적은 나날이 기대에 못 미쳤지만 그 와중에도 ‘난 잘 할 수 있어.’라는 생각을 계속 한 것에는 선생님들의 역할도 한 몫했다. “잘하는 애가 왜그러니.” 여기서 핵심은 “왜 그러니.”였겠지만 나의 귀는 “잘하는 애”까지 밖에 듣지 못했다. 성적은 떨어져가고 성적표가 나오는 날에는 집에 들어가기 싫은 날들이 늘어나고 방학을 했는데도 성적표가 나오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치다가 된통 혼나기도 일쑤였다. 그래도 ‘어떡하지? 에라 모르겠다. 뭐 어떻게 잘 되겠지.’ 라고 생각했다.      


  나는 굉장히 소심하다. 당연히 지금껏 살면서 백만 스물한 번 정도는 기죽을 일들이 있었지만 그대로 죽지 않으려면 멘탈이라도 다져야했다.      

“나는 할 수 있다!” 할머니에게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배운 것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는 매일 아침 집에서 나갈 때마다 그 한마디를 크게 복창시켰다. “나는 할 수 있다!” 지금도 사람들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 어떤 극한 상황이 닥쳐도 나도, 당신도 다 헤쳐 나갈 수 있다. 물론 그 마음먹기에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 그리고 그 노력에는 끈기와 자기 점검도 필요하다. “나는 뭐든 잘 할 수 있어.” 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다. 그 어려운 일을 당신이 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모든 일은 자신감이 만들어 낸다. ‘근자감’이라는 단어가 처음 생겨났을 때 참 마음에 들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니.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런 자신감 하나하나가 모여 우리들 자신에게 근거 없는 힘을 만들어낸다. 다 잘될거다. 몇 억의 확률 싸움을 이기고 태어난 우리라는데 그게 뭐라고 못할까?      


아무튼, 잘난 맛은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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