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얼마 전에 이제 막 교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선생님 한 분이 돌아가셨다. 그것도 학교에서. 그 사건은 사회 전반에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다. 교권 추락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모든 학부모가 비상식적으로 선생님을 괴롭힌 건 아니었을 텐데도 한목에 매도당하는 분위기다. 마치 맘충이란 말이 유행할 때처럼. 모두가 아이를 너무 사랑해서 벌어지는 일일 테다.
학부모는 선생님이 우리 아이를 잘못 대할까, 행여 기를 꺾어놓지는 않을까 불안해서 전전긍긍하고 아이를 제대로 가르쳐보겠다 의지를 불태우던 선생님은 학부모의 지나친 관여에 의지가 꺾인다. 학부모는 선생님을 믿지 못하고 선생님도 학부모를 믿지 못한다. 학교 사회가 위태로워진 이유이겠다.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아이 하나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의 정성이 필요하다고 한다. 아이 앞에 서 있는 어른들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있다. 최초의 양육자로서 어머니, 삶의 길을 안내하는 아버지, 든든한 지지자로서 친인척, 지인, 이웃 사람들, 그리고 객관적으로 법의 내면화를 실현해 주는 선생님까지. 이들 모두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주었을 때 아이들은 제대로 성장할 수 있다.
학교 사회가 삐걱거린다는 건 각자의 역할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리라. 사랑한다고 엄마가 아이를 마냥 품고만 있으면 주체를 형성할 수 없다. 친구 같기만 한 아빠는 제대로 된 안내자가 될 수 없고 의지꺾인 선생님 곁에서 올곧게 성장하는 아이를 기대하긴 어렵다. 내 아이 다 컸다고 남의 아이에 너무 무관심했던 건 아닌지 반성도 된다. 온 마을의 정성에는 분명 내 몫도 있을 터인데...
지금의 흉흉함이 일시적 해프닝으로 치부되려면, 우리의 미래가 안전하고 평화로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거울부터 들여다 볼 일이다. 거울에 비친 내가 곧 아이들이 바라보고 있는 타자이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정의로운가? 그 모습이 부끄럽지는 않은가? 그 모습을 우리 아이들이 따라 하는 게 바람직한가?
그다음에 각자의 역할을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타자로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역할을 하고 있는가? 어머니로서, 아버지로서, 선생님으로서, 어른으로서... 타자들이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다면 아이들은 문제없이 자랄 것이다. 올곧게 성장한 아이들이 다수인 사회는 당연히 지금처럼 흉흉하지 않을 것이다. 평화롭고 안전할 것이다.
현실이 몹시 무거워 두렵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외면할 수는 없기에 그림책과 아동문학, 그리고 프로이트와 라캉의 힘을 빌어 우리 모두가 아이에게 제대로 된 역할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 지 이야기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