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서 만들었다'는 흔한 천재 스토리
독일 남동부의 바이로이트(Bayreuth)는 인구가 7만 명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소도시지만, 세계인이 사랑하는 유명한 도시이다. 그 이유는 매년 7월 말부터 8월 말까지 한 달간 열리는 '바이로이트 축제(Bayreuth Festival)' 때문이다. 이 축제는 1876년부터 시작한 음악제로, 그 중심에는 작곡가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가 있다. 세계 각지의 바그너 마니아, 일명 바그네리언(Wagnerian)들이 몰려와서 바그너의 음악을 즐기는 유럽의 대표적인 축제이다.
바이로이트 축제가 이곳에서 열리는 이유는 단 한 가지, 그가 직접 설계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Bayreuth Festspielhaus)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바그너는 당시 전 유럽의 도시마다 유행하던 말발굽 형태의 가르니에(Garnier) 스타일의 오페라홀이 자신의 오페라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고, 바이에른의 왕 루트비히 2세(Ludwig II)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1876년 당시 시골이었던 바이로이트에 자신의 악극을 위한 오페라극장을 건축했다. 초기에는 드레스덴 오페라극장 젬퍼 오퍼(Semper Oper)의 설계자이자 절친한 친구인 고트프리트 젬퍼(Gottfried Semper)에게 의뢰했다가 라이프치히의 건축가 오토 브뤼크발트(Otto Brückwald)에게 수정하게 했다. 오페라홀에서 가장 중요한 객석과 무대는 바그너 자신이 직접 설계하여 완성했다.
바그너가 극장을 설계할 때 중요하게 고려한 것은 두 가지였다. 바로 음향과 건축(무대)이다. 첫째, 그의 음악이 연극에 바탕을 둔 새로운 형태의 악극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이태리식 오페라보다 대사와 지문이 많아서 훨씬 명료하고 깨끗한 음향이 필요했다. 둘째, 그의 오페라는 주로 독일 게르만족의 신화나 고전에 바탕을 두고 있어 웅장한 스케일의 무대와 배경 및 설비가 갖추어진 건축적 공간이 필요했다. 또한 바그너는 거대한 무대보다 깊고 낮은 곳에 계단식의 오케스트라를 배치해 관객의 시선에서 오케스트라가 보이지 않도록 설계했다. 그 이유는 모든 관객이 자신의 새로운 악극에 집중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이전의 오페라극장은 오케스트라가 무대 앞에 노출돼 있어 무대를 바라보는데 시각적으로 방해됐다.
또한, 측면에 발코니석이나 박스석을 두지 않고 지금까지는 없었던 부채꼴의 형상을 도입해 모든 객석을 로마의 야외극장과 같이 경사지게 배치했다. 어떤 자리에서든 잘 보고 잘 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모든 관중이 무대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으며, 공연 때는 객석의 조명을 모두 꺼서 관객이 무대에만 집중할 수 있게 연출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그 당시 주류를 이루던 가르니에 스타일의 오페라극장과 많은 면에서 대비된다. 무대와 객석부터 좌석까지 거의 모든 면에서 오페라극장과 다르게 건축됐는데, 이 모든 것이 바그너가 추구한 음향과 예술적 효과를 위한 것이었다. 극장의 생명인 음향에 있어서는 가수의 소리가 오케스트라에 간섭받지 않고 관객에게 명확하게 전달되도록 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바이로이트의 도심에서 떨어진 조용한 교외의 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바그너는 사람들이 자신의 음악을 듣기 위해 집에서부터 마차를 타고 출발할 때부터 새소리와 바람 소리 등 자연을 느끼면서 자신의 음악에 대해 상상할 것을 기대했다. 또한 그의 극장은 도심에 있는 화려한 오페라극장과 달리 매우 검소하게 지어졌지만, 모든 것이 그의 요구에 따라 기능적으로 건축됐다. 심지어 객석의 좌석까지도 딱딱한 나무 의자로 지었는데, 그것은 공연 내내 관객들이 작품에 몰입하기를 기대한 바그너의 의도 때문이었다. 극장의 실내에는 로비의 입구부터 극장 내부까지 고대 그리스시대의 열주(대들보를 지탱하기 위해 일정 간격으로 세운 기둥)와 함께 그리스 로마 시대의 원형극장과 같이 경사진 객석으로 전체가 구성돼 있다. 처음에 그가 바이로이트의 교외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이상한 창고 같은 극장을 짓는다고 많은 사람이 비웃고 비난했지만, 그는 자신의 이상과 철학을 고수하며 유례없는 독특한 스타일의 극장을 지었다.
1876년 8월 13일,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개관을 기념하는 첫 번째 무대로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Ring of the Nibelungs)> 전곡이 공연됐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양식의 새로운 극장에서의 공연인데다 바그너가 추구하던 낭만주의 음악과 독일 서사문학이 결합한 음악극(Musikdrama) 양식의 총체로서 의미가 큰 작품이었다. 특히 4부 <신들의 황혼(Götterdämmerung)>을 포함해 전곡이 연주된 것이 처음이었던 만큼 음악 애호가들의 주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 공연이 성공을 거두자 애호가들은 바그너의 새로운 작품을 갈망하게 됐고, 1882년에 바그너의 마지막 오페라 <파르지팔(Parsifal)>이 초연되면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본격적인 음악제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1876년 개관한 이후로 지금까지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는 바그너의 음악 이외에는 다른 곡을 연주하지 않는다. 바이로이트 축제는 경제적으로도 대단한 효과와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10년 후의 표 예매까지 완료될 정도니 그 명성을 알 만하다. 축제 동안 전 세계의 바그너 음악 애호가(Wagnerian)들이 축제극장에 모여 바그너의 음악을 듣는 것 외에도 이 작은 도시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소비를 촉진한다. 한여름의 밤낮을 뜨겁게 달구는 바이로이트 축제는 이 40일간의 도시 수입이 일 년 치 도시 재정의 상당 부분을 채운다. 150년 전에 지은 극장 하나가 지금까지 도시를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훌륭한 하드웨어(극장)와 훌륭한 소프트웨어 콘텐츠(음악)가 만나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음악의 양식과 음향적인 특성은 그에 맞는 공간에서 재생돼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다. 오늘날 바이로이트 축제가 세계 음악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바이로이트가 바그너의 성지가 된 것은 당시 바그너가 자신의 악극에 부합되는 가장 이상적인 음향을 가진 극장을 설계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오랜 시간이 흘러 극장의 외형은 낡았지만, 그가 쏟아부은 순수한 열정은 여전히 생동한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마치 '원조 본점'만이 내는 맛을 가진 곳이다.
한찬훈 (충북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건축학 박사이자 충북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전 한국음향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아태지역 국제음향학회 회장을 거쳤다. 모두가 사랑해마지않는 예술의전당 음악당도 그의 손 끝에서 탄생했다. 어쩌면 우리가 듣는 첫 음은 그가 그리는 종이 위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