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비극, 20세기를 빛낸 두 콤비의 흥행 공식
1597년 오페라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그리스·로마 신화는 200년간 가장 인기 있는 소재였다. 그러다가 낭만주의에 접어들어 멜로드라마가 득세하면서 갑자기 몰락해버렸다. 19세기의 주요 오페라 작곡가인 로시니, 베버, 도니체티, 벨리니, 베르디, 구노, 마스네, 푸치니 등의 작품 중 신화 소재는 거의 없다. '음악극(musikdrama)'이라는 새로운 악극을 주창한 바그너(Richard Wagner)의 경우 신화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지만, 그 자체가 그리스·로마 신화에 기초하지는 않았다. 20세기로 넘어와 신화 오페라를 부활시킨 일등 공신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다. 슈트라우스의 신화 사랑은 그가 바그너를 추종한 후기낭만파 독일 작곡가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겠지만, 세기말 빈의 가장 중요한 극작가의 한 사람이었던 후고 폰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을 만난 것도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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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트라우스와 호프만스탈과 협력한 첫 오페라는 아가멤논 일가의 비극을 다룬 <엘렉트라(Elektra)>(1909)다. 엘렉트라 신화는 그리스 3대 비극작가가 모두 다룬 이야기지만, 호프만스탈은 소포클레스(Sophocles)의 비극을 기초로 했다. 이 비극은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했다가 귀환한 아가멤논을 그의 아내인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살해하고,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아들과 딸인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가 친족 살인하는 끔찍한 이야기를 소재로 하며, 시종일관 복수를 요구하는 울부짖음과 피 냄새가 진동한다. 극에서 엘렉트라는 궁전에 어둠이 깔리자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한다. 반면 여동생 크리소테미스는 농부 아내로 살겠다는 입장이다.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악몽을 꾸었다며 나타나자 엘렉트라는 남자 맛을 아는 여자의 희생이 필요하다며 어머니를 모욕한다. 잠시 후 나타난 나그네의 정체는 죽었다던 오레스테스로 밝혀진다. 오레스테스가 궁전 안으로 들어가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그 정부(情夫) 아이기스토스를 차례로 죽인다. 복수에 성공했음을 안 엘렉트라는 미친 듯 춤을 추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쓰러져 꼼짝도 하지 않는다.
<엘렉트라>는 한마디로 냉랭한 공기가 흐르는 잔혹과 광기의 오페라다. 또 강렬한 인상을 주는 여자 가수 셋, 그중에서도 엘렉트라를 위한 오페라다. 엘렉트라는 초반부터 긴 모놀로그를 부르고, 쉴 새 없이 등장하는 인물들을 상대하며, 피날레에서는 폭발적인 노래와 함께 광기 어린 춤까지 추어야 한다. 광기에 휩싸여 있고, 강인한 의지로 무장된 전례 없는 여인상이다. 독일 오페라의 속설 중에 '좋은 소프라노라면 소리가 덜 익은 젊은 날에는 크리소테미스를, 한창 무르익은 전성기에는 엘렉트라를, 내리막에 접어든 다음에는 클리타임네스트라를 부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경력관리'라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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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Ariadne auf Naxos)>(1912)는 오페라 후반부의 '극중극' 형태로 테세우스에게 버림받아 낙소스 섬에 남은 크레타 공주 아리아드네의 이야기를 다룬다. 포도주의 신으로 잘 알려진 바쿠스(디오니소스)는 남자를 유혹하는 마녀 키르케의 술수로부터 간신히 빠져나와 섬에 도착한다. 이때 낙소스 해변을 거닐며 비탄에 잠겨 있던 아리아드네는 죽음의 사자가 나타난 것으로 생각해 그에게 다가간다. 아리아드네를 또 다른 마녀로 의심하던 바쿠스가 그 아름다움에 매료돼 조용히 입을 맞추자 아리아드네의 가슴에는 죽음의 상념이 사라지고 삶의 희열이 다시 눈뜬다. 회화 속의 바쿠스는 소년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오페라의 바쿠스는 테세우스를 단번에 잊게 할 만큼 초 영웅적 존재이므로 헬덴테너(영웅적인 음색을 가진 힘 있는 테너)의 우렁찬 목소리를 지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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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한참 흐른 후 호프만스탈이 대본을 쓴 <이집트의 헬레나(The Egyptian Helen)>(1928)는 트로이아 전쟁 이후 헬레나가 그리스로 돌아가는 과정의 소수설을 담은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연극이 원작이다. 아내 헬레나를 되찾은 메넬라오스는 스파르타로 돌아가던 중 태풍을 만나 이집트의 작은 섬에 도착한다. 섬의 주인 아이트라는 메넬라오스에게 함께 도착한 헬레나는 허상이요, 진짜는 지난 10년간 이곳에서 보호하고 있었다고 속인다. 이에 부부는 옛날처럼 맺어지지만 잠에서 깨어난 메넬라오스는 다시 헬레나를 의심한다. 그러다가 아이트라가 두 사람의 딸 헤르미오네를 데려오면서 부부는 다시 굳게 맺어진다. 이 오페라는 나름 흥미로운 내용이고 볼거리 풍부한 작품임에도 워낙 생소한 이야기를 또다시 각색한 바람에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중 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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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만스탈이 세상을 떠난 후 슈트라우스의 오페라는 광채를 잃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그나마 빈의 연극학자인 요제프 그레고르(Joseph Gregor)가 대본을 쓴 오페라 중 두 편이 그리스·로마 신화를 다루고 있다. 슈트라우스가 비교적 만년에 작곡한 작품 <다프네(Daphne)>(1938)는 대본이 전체적으로 신통치 않지만, 다프네가 나무로 변해 가는 장면은 무척 흥미롭다. 여기서는 아폴로가 다프네를 추격하는 것이 아니라 삼각관계 속에서 연적인 양치기를 활로 쏘아 죽이고 만다. 그 죄책감 때문에 아폴로는 다프네를 취하지 못한다. 대신 다프네를 영원히 월계수로 만들어 염원의 대상이 되게 해달라고 제우스에게 탄원한다. 슬픔에 빠졌던 다프네는 발이 땅에 붙고 월계수로 변해 가면서 상상하지 못했던 쾌감을 느낀다.
2년 뒤에 나온 <다나에의 사랑(Die Liebe der Danae)>(1940)은 '황금의 손' 미다스 왕을 등장시켜 최초의 인간 영웅 페르세우스를 낳은 다나에 신화를 크게 비틀었다. 에오스의 왕은 나라가 파산할 지경에 이르자 다나에 공주의 남편감으로 부유한 미다스를 점찍는다. 다나에를 차지하고 싶은 유피테르(제우스)는 미다스의 모습으로 변신해 궁전에 도착한다. 사실 평범한 마부였으나 유피테르 덕분에 황금의 능력이 생긴 미다스는 심부름꾼으로 변장해 다나에의 눈길을 끈다. 다나에는 미다스의 실수로 황금이 됐다가 유피테르의 힘으로 본래 모습을 되찾은 후, 전능한 신이 아닌 가난한 마부로 돌아간 미다스를 남편으로 선택한다. 이 오페라는 황금의 비를 미다스와 결합한 아이디어가 신선하고, 유피테르가 사랑했던 인간 여인들인 세멜레, 에우로파, 알크메네, 레다가 옛정을 운운하며 등장하는 장면이 두 번이나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파괴된 기독교 문화를 대체하기 위해 그리스 비극 문화의 재생을 모색했다. 그는 "진리를 알 수 없는 곳에서 거짓이 허용되는데, 그곳이 바로 예술가의 작품"이라고 보았다. 그렇게 20세기의 신화 창조는 정당화됐다. 그리고 니체의 사상에 심취한 슈트라우스는 호프만스탈과 손잡고 신화 오페라에 숨을 불어넣었다. 슈트라우스의 오페라가 니체가 말한 '위대한 예술의 거짓'은 아니었을까? 신화의 진실도 인간사의 진리도 여전히 미궁 속에 있지만, 극 중 인간들은 저마다 분명한 의지로 삶의 의미를 찾았으니 말이다.
유형종 (무지크바움 대표, 음악 칼럼니스트)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방앗간, 무지크바움의 주인장이다. 클래식 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예술을 강의하는 강연자로서 클래식 음악을 나눌 수 있는 곳엔 장르 불문 항상 그가 자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