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에서 피어난 화려한 서정시 Op. 22
#I’m_나라는 사람
68년생 조진이
저는 어린 시절 동네에서 뛰어놀다가 어디선가 바이올린 소리를 듣게 됐어요. 직접 연주하는 건지 음원인지도 몰랐지만, 오묘한 소리에 이끌려서 어머니께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렇게 일곱 살에 바이올린을 시작했는데 배우는 속도가 조금 빠른 편이어서 이듬해부터 개인 레슨을 받게 됐어요. 그 당시엔 바이올린이 제 운명을 결정해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저 바이올린이 재미있었기 때문에 꾸준히 배웠던 거죠. 인문계 중학교에 다니면서 간혹 학예발표회나 교내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정도였어요.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때 진로를 고민하다 선화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비로소 바이올린에 주력하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제 성격은 처음에는 낯을 가리지만, 이내 잘 적응하고 활동적인 편인 것 같아요. 어릴 때 아버지께서 직장을 옮기면서 청주에서 서울로 전학을 오게 됐는데, 환경이 낯선 탓에 한동안 외향적인 끼를 숨기고 다녔어요. 그런데 차츰 친구들을 사귀면서 활동적인 성격이나 끼가 잘 숨겨지지 않더라고요. 지금도 비슷한 것 같아요. 오지랖도 넓고 사교적인 성격이라 사람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편이에요. 대신 호불호는 강한 편이에요. 고치려고 노력하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는 일에 마음을 다해 몰입하는 성격이라 장점으로 작용할 때도 많아요.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이
대학생 때 우연히 신문에서 광고를 봤어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창단해서 단원을 모집한다는 공고였어요. 당시에는 시립교향악단 정도만 있었을 때라 이런 기회가 마냥 신기했어요. ‘언젠가 나도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고 싶다’라는 꿈을 품었죠. 그러다 대학교 4학년 때, 지금은 돌아가신 이수호 은사님께서 제게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시험을 보라고 추천하셨어요. 운 좋게 합격해서 1990년 12월에 입사하게 됐어요. 마음에 품고 있던 곳에 합격하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가족들이 앞다퉈 전화를 걸어 축하해 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벌써 30년이니까 정말 긴 세월을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와 함께 보냈죠. 그러니 바이올린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는 제 인생에 있어서 가족과도 같은 존재에요.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 열정은 그대로인 것 같아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기에 앞으로도 더 열정적으로 연주하고 싶어요.
#Music_개인적 취향
68년생 조진이
몇 년 전부터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어요. 헬스장에 다닌 지 3년 정도 됐고, 최근엔 필라테스를 시작했어요. 바이올린을 오래 하다 보면 몸의 균형이 맞지 않게 돼요. 틀어진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필라테스를 시작했고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요. 저는 영화광이기도 해요.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블라인드 사이드(Blind Side)>인데, 부잣집 여자가 할렘의 흑인 아이를 도와주면서 미식축구 선수로 키우는 이야기에요. 저도 영화제목처럼 사각지대의 존재들을 돕고 싶은 열망이 있어요. 어릴 때부터 강아지를 좋아했고, 유기견 문제에 관심을 두다 보니 어느새 강아지 5마리와 고양이 2마리를 키우고 있죠. 일본인 부부가 운영하는 평택의 유기견 보호소에 종종 봉사하러 가기도 해요. 가끔은 뜻이 통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함께하기도 하고요. 개인 SNS 계정에 ‘모피를 입지 말자’,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자’ 등의 문구를 올려서 동물 보호나 환경 보호를 독려하고 있어요. 그리고 평소에는 주로 가요를 들어요. 특히 가수 ‘이적’을 좋아해요. 예전에 남편이 근무지를 옮기게 되면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됐어요. 저 혼자 서울에서 6개월을 지냈는데, 그때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다가 이적의 ‘걱정말아요 그대’를 듣고 큰 위로를 받았어요. 지금도 출퇴근길 플레이리스트에서 그의 음악은 빠지지 않아요.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이
음악 취향에서 클래식 음악도 빠질 수 없죠. 베를린 필하모닉 공연이나 관심 있는 연주자의 무대를 유튜브에 검색해 보기도 해요. 요즘 빠져 있는 연주자는 중국의 피아니스트 ‘유자 왕(王羽佳)’이에요. 보통 클래식이라고 하면 드레스를 입고 얌전하게 연주할 것 같은데 이분은 짧은 치마에 킬힐이나 원색 원피스에 롱부츠를 신고 무대에 등장하기도 해요. 화려한 패션 못지않게 연주도 파워풀하고 감각적이에요. 아무래도 저는 오케스트라에서 합주만 하다 보니 통념을 뛰어넘는 연주자나 무대를 보면 대리만족을 느낄 때도 있어요. 지난 6월 카네기홀 재개관 기념 무대에서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했는데, 정말 환상적인 무대였어요.
바이올리니스트 중에서는 ‘힐러리 한(Hilary Hahn)’을 좋아해요. 겉모습은 냉정해 보이는데 소리는 어쩜 그렇게 따뜻하게 내는지 볼 때마다 놀라워요. 저는 아직 그런 경지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모로 자극을 주는 예술가예요. 제가 즐겨 듣는 곡은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Henryk Wieniawski)’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이에요. 이 곡을 들으면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아요. 멜로디만 들어도 상상이 펼쳐지는 음악이 있는데, 이 곡이 저에게는 그래요. 들판을 뛰어다니는 듯하다가 갑자기 외로움이 느껴지기도 하고, 힘찬 연주를 듣고 있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아려오기도 해요. 화려함 속에서도 서정적이고, 긴장감 속에서도 낭만적인 그의 음악은 색과 향이 풍부해요.
#Outlook_세계관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이
바이올린은 낮은 소리부터 아주 높은 소리, 강한 소리부터 얄미운 소리까지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는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악기에요. 계절, 감정에 따라 어울리는 소리도 낼 수 있고요. 현악기 중에서 특히 바이올린은 고음 표현이 가능해서 그런지 변화의 폭이 크게 느껴져요. 얇은 활 하나와 작은 통의 악기로 그 많은 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바이올린의 특권이자 매력인 것 같아요. 제게 음악은 가족처럼 소중하고, 강아지만큼 애틋한 존재예요. 인생에서 음악을 모르고 살았다면 참 슬펐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음악의 존재를 요리에 비유하자면 맨 마지막에 넣는 들기름 같은 거예요. 누군가에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수 있지만, 그 하나로 모든 요소가 조화로운 맛을 내기 시작하거든요. 저는 7년 뒤에 은퇴할 계획이라 지금 하는 모든 연주가 정말 소중해요. 예전에는 힘들고 지칠 때도 많았지만, 무대를 떠날 날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니까 지금은 연습하는 시간조차 소중하게 느껴져요. 그래서 오늘을 아낌없이 쓰고 싶어요.
코심 단원 조진이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단원이 되고 나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어요. 당시엔 일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바쁘고 힘들었어요.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미안함도 늘 마음에 남았고요. 아이들이 어릴 때 “누구네 엄마처럼 동사무소 다니면 안 돼?”라고 말한 적도 있어요. 정해진 시간에 퇴근하는 부모님이 부러웠나 봐요. 이제는 아이들이 성장해서 오히려 제가 힘들 때마다 든든하게 지탱해줘요. “조금만 더 버티자”고요. 요즘에는 퇴직하면 무엇을 할지 생각해요. 퇴직하더라도 나이 든 사람들끼리 모여 의미 있는 일을 했으면 해요. 작은 모임을 만들어 연주 활동이나 봉사를 다니면 좋겠어요. 최근에는 코로나19로 봉사 연주할 기회도 부쩍 줄었는데, 제가 가진 재능을 마음껏 나눌 수 있기를 바라요.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의 주인공처럼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나누는 마음을 가진 멋진 어른이 되고 싶어요.
#Stage_무대 위 순간들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이
7~8년 전쯤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했던 봉사 연주가 기억나요. 지금은 퇴직한 첼로 수석이 단원들을 모아 봉사 연주를 하자고 했죠. 세브란스 병원에서 로비 음악회를 열었는데 많은 분이 좋아하셨어요. 몸이 아픈 환자들은 물론 의료진마저 지쳐 웃음기 없는 삭막한 분위기에 잠깐이나마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게 감동적이었어요. 무대 위에서만 공연하다 보면 관중의 반응을 일일이 체감하기 어려워요. 그런 면에서 찾아가는 공연은 연주자에게도 활력을 주는 무대가 되죠. 더구나 코로나19 이후로 한동안 무관중 공연을 하다가 최근 오랜만에 관중이 있는 공연을 하게 됐는데 그때 확실히 느꼈어요. ‘연주자는 박수를 먹고 산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죠. 객석의 박수 소리만큼 좋은 게 없더라고요. 오케스트라 단원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솔로 무대를 설 일은 거의 없어요. 하지만 큰 무대든 작은 무대든 저의 연주를 들어주는 분들이 있고, 또 음악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코심 단원 조진이
30년 전에 말러의 곡을 연주한 적이 있어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에서도 처음으로 시도하는 공연이었어요. 다 같이 조용히 앉아서 레코드를 끝까지 들었는데 익숙한 베토벤, 모차르트의 음악과는 또 다른 경지가 열리는 듯했어요. 마치 새로운 차원의 문을 열고 들어간 느낌이었죠. 심장이 막 떨리더라고요. 2019년 연말에는 말러 탄생 160주년을 앞두고 말러가 6년에 걸쳐 작곡한 교향곡 제2번 '부활'을 공연하기도 했어요. 말러가 제게 선물했던 기쁨을 지금도 잊을 수 없어요.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면 세계의 유명 연주자와 협연할 기회가 많이 주어져요. 그들과 동료로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무대에 서는 것 자체도 기쁘지만, 함께 연습하는 과정도 벅찬 일이에요. 그중에서도 2001년에 ‘플라시도 도밍고(Placido Domingo)’,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 ‘호세 카레라스(Jose Carreras)’와 함께한 ‘쓰리 테너 콘서트’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연주자들과 무대를 하니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느낌도 들었죠. 아무래도 그런 무대를 하게 되면 기분이 들떠서 실수하게 될 여지도 있는데, 저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게 되더라고요. 사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모두 무대 체질이에요. 연습할 때 어떤 부분이 잘 맞지 않아서 걱정하다가도 정작 무대에 오르면 귀신같이 잘 맞거든요. 그럴 땐 ‘참 대단한 사람들과 일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의미에서 어떤 협연자보다 우리 단원들과 함께하는 매 순간이 소중하고 모든 무대가 자랑스러워요.
글쓴이 이리 (공공문화 칼럼니스트)
단거리보다는 장거리에 능한데 끈기가 부족하다. 일 처리를 해놔야 속 편한데 게으른 편이다. 결단이 빠르고 성미가 급한데 만든 회사 이름이 '슬로우모어'다. 완벽한 문과 체질인데 뼛속부터 이과 체질인 남자와 살고 있다. 잘하는 건 없는데 시키면 다 한다. 부캐는 순수한 예술세계를 지향하는데 본캐는 철저히 상업 예술로 벌어먹고 산다. 한 마디로 일관성 없는 것이 일관적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