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책장

by 강상록

"책이 없으면 화장실을 못 갔어요."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으로 한국인 최초로 토니상 6관왕을 수상한 박천휴 작가의 말이다. '활자 중독' 수준이었다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는 언제부터 활자 중독이었지. 언제부터 책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책에 대한 첫 기억은 초등학교 저학년쯤이다. 어머니와 함께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은 꼭 시내에 있는 대형서점에 갔다. 가는 길부터가 재미있었다. 지하상가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반쯤 오르면 왼편에 서점으로 향하는 문이 있었는데, 그 문을 통과해 안쪽으로 들어가면 그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넓은 크기의 서점이 나왔다. 그곳은 큰 빌딩의 지하에 있는 서점이었고 입구가 지하상가에 연결되어 있을 뿐이었지만 어린 나에게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 같은 느낌이었다. 서점에 들어가면 다양한 서가를 돌아다니면서 책을 꺼내고 넘겨봤다. 그 나이에는 이해되지 않을 책들도 괜히 재미있게 느껴졌다. 알록달록한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있는 공간이 좋았다. 책장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며 구석에 앉아 책을 보던, 나에게는 모험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책에 대한 그다음 기억은 이상하게도 이런 목소리다. "책 좀 읽어라." 어머니의 목소리. 어쩌다가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책을 멀리하게 되었을까. 어머니의 기준에 못 미쳤던 건지, 내가 정말로 책을 안 읽게 되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렇게 책에 대한 기억이 끊겼다가 대학생 때로 이어지는데, 기억의 공백이 큰 걸 보면 진짜 책과는 담을 쌓았던 것일지도 몰랐다. 예상컨대 '입시'라는 구렁텅이에 빠져 교과서와 문제집에 있는 활자를 읽느라 정신이 없었으리라.


대학교 도서관은 6층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면에 네다섯 개의 책상이 죽 일렬로 놓여 있었고 책상 양옆으로 책장들이 줄지어 있었다. 어린 시절 서점에서와 비슷하게 책장 사이를 돌아다니며 책을 골랐다. 서점에서의 기억이 좋아서였는지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책을 구경하고 보는 일이 즐거웠다. 책장 간격이 좁아 아늑한 느낌이 들었고, 그 아늑한 공간에서 책이 주는 뜻밖의 위로를 받으며 책을 읽었다. 공간은 좁아도 책을 통해 넓은 세상을 만났다. 많은 것을 배웠고 생각했고 꿈꾸게 되었다.


창문이 많았던 도서관에는 창가 옆 구석진 자리에 '숨어있는' 작은 책상들이 많았다. 가장 구석에 있는 창가 옆자리에 앉으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으면서 햇살을 맞으며 책을 볼 수 있었다. 그런 시간 자체가 기쁨이고 행복이었다. 비록 공부할 교과서는 내 키만큼 높게 쌓였으나 도서관에서 책 읽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어린 시절 그 서점이 경영난을 겪는다는 소식을 들었었는데, 결국 최근에 문을 닫았다. 학교 도서관은 진즉 졸업한 아저씨의 출입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는다. 서점에서 서가를 돌아다니며 모험하던 심정으로, 도서관 구석에서 나만의 책을 발견했을 때의 마음으로, 나는 이제 브런치에 만들어진 나만의 책장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돌아다닌다.


책이 좋았던 나는 나의 책을 만들고 있다. 지금 브런치에 있는 책장에는 책이 딱 세 권 있다. 서점이나 도서관과 비교하면 망해가는 수준이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모두 내가 쓴 책이라는 것. 어느 출판사에서 이런 글들을 책으로 내줄까 싶지만, 꾸준히 써서 책장에 열 권쯤의 책이 쌓이고, 누군가 봤을 때 '이 사람은 책을 열심히 써왔군'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 때쯤이면, 어쩌다 한 권쯤은 실제 세상에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나만의 책장에 있던 그 한 권이 어느 서점 귀퉁이에, 어느 도서관 창가 자리 옆에 조용히 꽂혀있는 꿈을 꾼다. 누군가 그 책을 펼쳐보며 꿈을 펼치고 위로받는 꿈이다. 이곳은 작가의 꿈이 현실이 되는 나만의 책장이다.





작가의 이전글고양이는 무슨 잘못을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