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가지 못하고 쓴다
여행작가 태원준의 블로그를 염탐하고 있던 차였다. 어느 날 나는 보았다. 싸구려 비행기표를 발견하면, 오직 야경을 보러 뉴욕으로 날아간다고 적은 그의 문장을. (정확히는, ‘오로지 야경을 보러 뉴욕에 가곤 했어요’다.) 물론 반짝이는 뉴욕의 야경사진도 함께였다. 야경만을 위한 뉴욕 여행이라니, 생각만 해도 멋지잖아? 그렇다면 나도 어디 한 번! 이내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에서 좀이 쑤시려나. 인천에서 직항으로 14시간 20분. 경유로는 20시간 이상 걸린다. 스탑오버도 되려나. 20시간 이상이면 중간에 어느한곳에서 쉬어가도 괜찮겠지? 같은. 그러고 보니 한 번도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는 타본 적이 없었다. 그건 어떤 기분일까. 갑자기 콜럼버스가 되는 망상에 빠져본다. (콜럼버스도 태평양을 가로지른 적은 없다)
그의 뉴욕 이야기를 들으니 캐나다에서부터 미국, 그리고 중남미의 나라들까지 꼼꼼하게 돌아보고 싶던 꿈이 떠올랐다. 내게는 아메리카 대륙을 여행하는, 그러니까 '아메리카 종단 여행'은 꽤 오래된 꿈 중 하나였다. 나는 어쩐지 캐나다를 별 볼일 없는 나라로 낙인찍었는데, 그러면서도 옐로나이프는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곳의 오로라는 언제나 내 여행 버킷리스트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곳을 시작으로 긴 여행을 꿈꾸고 있었다.
오랜 친구인 M과도 분명히 약속을 했다. 언젠가는 꼭 옐로나이프에 가자고. 며칠 밤이고 오로라를 실컷 구경해보자고. 지나치게 춥지는 않을지, 가는 길이 혹시라도 너무 고되지는 않을지 그런 것은 그때의 내가 할 일이니 그런 고민은 미래의 우리에게 맡기자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여행을 방해하는 진짜 복병은 다른 곳에 있었다. 매월 찾아오는 신비로운 날들을 시작으로, 더 큰 어려움은 ‘혼인’에 바짝 붙어 따라온다. 결혼하면 일단 배우자와의 상의나 어떤 경우에는 허락이 필요하게 된다. 어느 어마어마한 집은 여행을 떠날 때 시부모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게다가 임신을 한다면?
대체 언제 '아메리카 종단 여행'을 떠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다가, 맞닥뜨린 최고의 문제였다. 있는 힘껏 빠르게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면? 임신보다 더 큰 문제가 닥친다. 누가 그랬다. 임신을 하면 14년쯤은 해외여행을 생각도 못하게 된다고. 나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물론 어떻게든 방법이야 있겠지만, 양육하는 동안 마음대로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처지인 부모는 그리 많지 않을 거였다. 아무리 되짚어봐도 14세 이하의 자녀를 둔 기혼 여성끼리의 여행을 나는 본 일이 없다. 중학생 이전의 나와 내 부모님의 역사가 필름처럼 빠르게 머릿속을 스쳤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을, 기어코 선명히 본 것 같았다. 이런 막연한 이유들 때문에 M과의 약속도 ‘몇 년 후’ 정도로도 미처 정해지지 못하고 ‘언젠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음. 그런데, 꼭 한 번에 세계일주 해야 해? 그냥 한 군데씩 여행하면 되잖아."
언젠가 그 애에게 세계일주를 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 애의 답이었다. 그때의 나는 왠지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는지, 금세 수긍하고 말았다. 그렇게 양보한 것이 내게는 아메리카 종단이었는데, 그 후로 나이만 차곡히 쌓여갔다. 정말로 굳게 마음먹지 않으면 자꾸만 미뤄지는 것들이 있다. 마음 한구석에 웅크려져 있는 것을 알면서도 살아나가느라 모른 척하게 되는 것들 말이다. 내게는 대게 여행이 그렇다. 그러면서도 아메리카 종단 같은 긴 여행은 두눈 꾹 감은채로 조금 더 모른 척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대신 야경 보러 뉴욕에 가는 일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언젠가의 긴 여행이 시작되기 전, 오직 야경을 위한 맨해튼을 상상한다. 30만 원짜리 싸구려 비행기 티켓을 샅샅이 찾아보기로 한다. 나는, 뉴욕으로 떠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