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의 피렌체에서

: 가끔은 바보 같아보일지도 모르지만

by 에트바스

내가 세상에 필요한 존재이긴 한 걸까 하고 상심하는 날들이 있다. 어떤 날은 내가 이 세상과 꼭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들어 한껏 마음이 편안해진다. 내가 사라지면 내가 있던 자리도 텅 비어 버릴 것만 같은 기분. 지난 피 렌체의 밤은 그랬다.


남들은 다 대학 다닐 때 유럽여행 간다고 하던데 난 지금까지 무엇을 한 걸까. 유달리 공부를 잘하지도, 그렇다고 실컷 노는 것을 즐기지도 못한 시간들을 떠올렸다. 후회하지 않고 사는 방법에 대해 자주 고민했으면서도, 그것만큼은 직장생활 내내 나를 괴롭혔다. 나는 겨우 직장을 그만둘 때쯤 유럽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20대 시절 내내 상상하고, 일 년 전부터 계획하고 기다렸던 유럽여행인데 막상 티켓팅 날짜가 다가오자 나는 어쩐지 가슴에 돌덩이를 끌어안고 있는 것만 같았다. 흔히 사회생활이라 불리는 일상은 너무 익숙해져서 질릴 대로 질려버렸고, 8년 동안 회사를 다닌 대가는 생각보다 훨씬 소박했다. 마음껏 유럽을 여행하기엔 여전히 통장은 가볍고, 시간은 부족했다. 돈이 많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많으면 돈이 없다는 얘기를 누가 한 것 같은데, 시간도 돈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은 없는 건가. 유럽 여행의 낭만을 상상하다가도 현실이 나를 흘겨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비상금이라도 하자 싶어 적금도 깨 버렸다. 연휴를 끼워 맞춰 10일의 휴가를 겨우 받아내고, 헐레벌떡 여행을 준비했다. 여행의 기쁨은 출발 전 기대와 설렘이 절반이다. 나는 그런 것을 느낄 새가 없었다. 이런 건 아무래도 낭만적인 유럽여행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함께 떠나기로 한 HJ. 그 애는 나와 성격 완전히 다른 친구다. 성격유형검사를 동시에 받는 다면 우리 둘은 정 반대인데 어떻게 친구가 되었냐며 놀림받았을 것이다. 그 애는 내게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는데, 어디서나 적극적이고 다정하고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그 애와 함께 있으면 나와 다른 점에 새삼 놀라며 때론 부럽고 자주 즐거워하곤 했다. 우리 둘 다 여행을 좋아했지만, 여행을 대하는 방식은 좀 달랐다. 하긴, 세상에 성격이며 여행을 대하는 방식까지 같은 두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도 들은 적이 있다. 친구랑 여행 가면 무조건 싸우더라 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몇 박 며칠을 동고동락하면서 아무 말썽도 없다는 것은 내리사랑이 아니라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함께 떠나는데 별다른 고민이 없는 친구였다. 나도 그 애도 털어놓지 못하는 불편한 마음의 말들이 분명 있겠지만, 내리사랑 같은 완전한 관계가 불가능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번 여행은 그 애와 함께하는 가장 긴 여행이었다.





나는 여행 내내 조금 지쳐있었다. HJ때문이 아니었다. 100만 원이 훌쩍 넘는 시세에 무려 20만 원이나 싼 항공권을 얻어낸 기쁨은 아주 잠깐이었다. 나는 그 대가로 서른세 시간이 넘게, 공항이나 비행기 안에서 머물러야 했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진이 빠져 한동안 벤치 위에 앉아 있었다. 겨우 인쇄해온 지도를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캐리어를 들었다. 캐리어는 울퉁불퉁한 골목길 위에서 덜커덩거렸다. 캐리어 '유럽여행은 캐리어보다 배낭이 좋아요' 하던 조언이 떠올랐다. 여행자들이 이야기 나누던 웹사이트에서였다. 가끔은 흘러가는 조언들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질 때가 있다. 캐리어 바퀴가 빠져버릴 것만 같은 이 순간처럼.


겨우 숙소를 찾아 짐도 풀지 못한 채 잠이 들었다. 그날 저녁, 나와 다른 비행기를 탄 HJ도 숙소에 도착했다. 그 애는 애인과의 이별 소식을 전했다. 우리는 각자의 이유로 마음이 무거웠다. 이 여행은 어떻게 되는 걸까. 파리의 야경은 아름답고, 에펠탑은 듣던 대로 낭만이 가득했다. 공기조차 달콤한 도시라더니, 과연 그랬다. 달콤한 것은 달콤한 것이고,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관광지를 헤매고 다녔다. 다음은 베네지아. 야간열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베네치아에서 하룻밤 묵은 다음, 다시 피렌체를 향했다. 야간열차 덕분인지 온 몸에 피로가 몰려왔다. 이 피로들을 거뜬히 이겨내기에 우린 너무 나이 들어버린 것 같아 슬펐다.


피렌체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짐을 정리하고, 침대에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이대로 베개에 머리를 갖다 댔다가는 순식간에 밤이 될 거였다. 십 킬로그램이 훌쩍 넘는 캐리어를 들고 다니다시피 하면서, 겨우 도착한 낯선 도시. 한숨 돌려도 뭐라고 하는 사람 하나 없지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우리를 괴롭혔다. 여행자는 이방인이 되어 부지런히 걷곤 한다. 낯선 사람이 되고, 다시 낯선 사람들, 낯선 음식들, 낯선 풍경을 찾아 헤맨다. 그렇게 부지런히 여행해야 소위 '뽕뽑는'여행이 된다고 믿었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이곳에 온 나 자신을 향한 예의라고 믿었다.


혹시 이렇게 긴장하며 바쁘게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닐까. 생각해보면 지난 며칠, 일상에서보다 더 바쁘게 움직였다. 시간도 아끼고 숙박비도 아끼겠다며 생전 타보지 않은 야간열차까지 타면서. 나는 불안감을 누르고 침대에 가만히 누웠다. 조금은 거친 숨소리를 들어본다. 둔탁한 심장소리가 들린다. 낯선 느낌의 침대는 당연하게도 마음 놓일 만큼 편안하지가 않다. 애써 괘념치 않고 가만히 눈을 감고 침대 위에 축 늘어져 본다.


남들이 볼 때는 좀 바보 같아 보이겠지만, 이 순간만은 온몸 구석구석, 손가락 끝에서 발가락 하나하나 그 끝까지 자유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팔, 다리, 얼굴 근육에도 휴식 주고 싶어 졌다. 최대한 온몸에 힘을 빼자, 입도 반쯤 벌어졌다. 침대와 내가 꼭 한 몸이 된 것 같은 기분, 꼭 맞아떨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모든 것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처음부터 나를 위해 이 세상이 만들어진 느낌, 온 우주가 나를 포근히 안아주는 기분 좋은 상상까지. 나는 순식간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급히 HJ를 불렀다.


- HJ! 나처럼 누워봐. 힘 빼고 입도 벌리고.


이것처럼 꼼꼼히 챙기느라 늘 나보다 조금 바쁜 HJ. 내 말을 듣고 그 애도 옆 침대에서 천정을 보고 누웠다. 나는 물론 여전히 누워있는 중이었다. 긴장을 풀자, 그 애의 입도 조금 벌어졌다. 큭큭크. 갑자기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방 안에는 우리 둘 뿐이었지만, 갑자기 누가 들어온다면, 그래서 여자 둘이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는 이 모습을 혹시라도 본다면.. 그런 상상을 하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어린 이가 된 것처럼 깔깔대며 웃어댔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아무 생각 없어본지가 대체 언제였던지 가늠할 수 조차 없었다. 어찌어찌 시작된 이 여행도, 한국에 잠시 두고 온 일상에서도 나는 멍할 새 없이 너무 바쁘게만 흘러 다녔던 건 아닐까.






가끔은 그때의 피렌체를 생각하며 몸을 뉘인다. 가만히 누워서 크게 숨을 들이쉰다. 그럴 때마다 정말 내가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특히 나는 진짜 제대로 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이 들 때 도움이 된다. 혹시 그게 아니더라도 가끔은 이렇게 멍하게 시간을 보내는 거다. 핸드폰만 쥐어도 재미있는 것 천지인 요즘이지만 딴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세상 속에서, 가끔은 이렇게 충전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물론 자기만의 방법이 있다면 그것도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