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어떤”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니체
남편의 폐가 단시간에 염증으로 가득했던 이유는 사이토카인 폭풍(cytokine storm)인 것으로 추정된다. 인체는 외부에서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이에 대항하기 위해 면역 물질인 사이토카인을 분비하는데 어떤 연유에 의해 사이토카인이 과다하게 발현, 작용하면서 인체의 정상적인 기능까지 해치게 되는 것이다. 스페인 독감 때 25세~45세의 아주 건장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난 엄청난 사망률도 이 사이토카인 폭풍으로 면역체계가 과민 반응을 일으켜 신체조직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생긴 2차 피해가 원인이었다. 남편이 젊어서 코로나 바이러스에 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코로나에 더 위험했던 것이다. 문제는 아직까지도 사이토카인 폭풍에 딱 맞는 특효약이 없다는 것이다. 바이러스와 면역계의 싸움에서 인체의 면역계가 승리하면 사이토카인 폭풍이 잦아들며 정상체온으로 돌아가는 길뿐이다.
다행히 남편의 면역계는 바이러스와 싸움에서 이겼다.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로 간지 한 달여 만에 일이었다. 에크모 기계장치도 몸에서 떼어내게 되었으며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투여되던 마취제도 더 이상 투여할 필요가 없어졌다. 폐가 염증으로 뒤덮여 숨을 쉬기 어려웠던 상태가 순식간에 일어난 만큼 회복하는 것도 빨랐다. 젊음이 깡패라는 말이 실감 났다. 남편의 몸이 회복을 거듭할수록 남편이 머물던 병동 또한 코로나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동으로 옮겨졌다.
마취라는 게 일정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잠이 들었다가 마취가 풀리면 깨어났다. 눈을 뜨면 안경도 쓰지 않아 앞은 잘 보이지 않았고, 병실에 혼자 누워 있는 상황이 이해가 잘 안 되었다. 침대에서 일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였고, 그럴 때마다 간호사가 놀라서 뛰어와 마취제를 다시 투여했다. 장시간을 그렇게 누워서 마취상태가 이어지다 보니,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부작용이 생겼다. 코로나 중증환자의 흔한 부작용 중 하나로 꼽는 섬망 증세였다. 꿈은 현실과 연결되어 있었고, 꿈과 꿈이 맞닿아 있기도 했다. 비슷한 꿈이 반복되기도 했고, 꿈속에서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다 나중에는 나에게 마취제를 투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됐다. 그래서 몸부림하며 소리쳤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해봐야 나는 마취가 안 돼요! 그러니까 제발 뭐 좀 내 몸에 처넣지 말아 줘요!”그러나 이런 말을 실제 목소리로 간호사에게 전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기관절개를 해서 말을 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간호사들은 반복적으로 나를 찾아와 내 상태를 점검했다. 모두 방호복으로 완전히 무장한 상태였고, 나는 그들의 보호 안경 속 눈빛만 읽을 수 있었다.
꿈에서도 나는 대개는 코로나 환자였고, 병원 병실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그 병원은 실제 내가 입원했던 병원과는 다른 지역에 있었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병원이었다. 어쨌든 그곳에서 나는 독방에 누워 있었고, 거기에는 주차장 입구가 인접한 창문이 있었다. 그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불빛으로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를 구분할 수 있었다. 시간의 흐름은 몹시 빨라서 낮이 된 것 같았는데, 다시 금방 밤이 되었다. 사람들이 길거리를 걸어 다니고 차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이면 누군가를 찾듯 소리도 쳐봤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 통로에 난 창문의 존재도 그렇고, 그 창문에 고개를 박고 밖을 내다보는 나의 존재도 알아봐 주지 않았다.
손만 뻗으면 세상에 닿을 것 같은데, 세상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다. 벽에 시계가 걸려 있었고, 그걸 보고는 지금이 어느 시간 즈음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시계를 보고 시간을 알 수 없다는 게 좀 이상했다. 어느 날이었다. 사방이 까만 것이 밤이었다. 하늘에 벌거벗은 사람들 정확하게는 죽은 이들의 육신이 다닥다닥 무리를 지어 떠 있었다. 마치 강물이 흘러가듯이 어느 곳을 향해 그들 무리가 천천히 선 채로 움직였다. 그들이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 역시 그 시신들 무리에 섞여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이 묘하게 소름 끼쳤다. 누군가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영화의 내레이션이라도 하듯 설명을 해주었다. 어떤 꿈에서는 죽은 몸이 되었다. 의료진이 내가 죽었다고 말했으니 죽은 몸이긴 한데, 내 의식은 또렷이 깨어 있었다. 차가운 이동식 매트 위에 누워 있었고, 벌거벗겨져 있었다. 하얗고 얇은 시트 한 장이 내 몸을 덮고 있었다. 다만 아팠다. 죽은 몸이었지만,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그 간호사의 눈을 쳐다보았다. 간호사는 내가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이 왠지 낯익었다. 나는 그 간호사가 성인이 된 내 딸이라고 생각했다. 첫째인지 둘째인지는 분간이 안 되었고, 그냥 내 딸이었다. 너는 왜 하필 시신을 처리하는 직업을 택했을까, 하면서 안타까움을 속으로 되뇌었다. 시간의 개념이 엉클어져 있었다. 눈을 떠보니 다시 병실이었다. 나는 다급하게 간호사를 불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의사 표현하기가 몹시 불편했다. 간호사가 필기도구를 가져왔다. 거기에 힘겹게 손을 움직여 글을 썼다. 타임슬립의 원조 격인 영화 <사랑의 블랙홀>에서 주인공이 죽었는데 그 후로 다시 깨어나 똑같은 아침을 시작하는 것처럼, 나에게도 똑같은 순간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왜 팔다리가 묶여 있는지 이해를 못 했고, 그래서 매번 똑같은 난리를 쳤던 것 같다.
“XX대학병원으로 옮겨주세요.”
내가 사는 동네에 있는 대학병원이었다. 간호사가 얼마나 황당했을까. 물론 나와 비슷한 중환자 중에는 별별 환자들이 다 있겠지만, 중환자실에서 치료받고 있던 환자가 갑자기 깨어나 병원을 옮겨 달라는 경우가 흔치는 않았을 것이다. 어이없어할 간호사와 달리 나는 아내가 없이 집에 방치된 딸들을 위해 최소한 병원이라도 집 근처로 옮겨야만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도 의료진은 병원을 옮길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병원에서 탈출하기 위해 맹렬하게 애쓰는 꿈을 꾸게 되었다. 나는 분명히 코로나가 완치되었는데, 병원에서는 계속 사지를 묶어 놓고 있다고 믿었다. 뭔가 이렇게 나를 그냥 고립시켜 놓고, 여기서 평생 죽을 때까지 가둬 놓을 것이라는 극심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다.
그래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벗어나려고 해도 늘 제자리였다. 나중에는 ‘그러면 차라리 그냥 죽어 버려야지.’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이번 생은 글렀고, 환생이나 하자는 차원이었다. 그런데 혀를 깨무는 것은 아플 것 같아서 시도를 못 했다. 숨을 참아서 죽어야지, 했는데, 숨쉬기를 멈출 수도 없었다. 결국 괴로운 시간만 흘러갔다. 그러다 다시 꿈을 꾸었고, 그 꿈에서도 나는 여전히 이동식 침대에 묶인 채로 군용 헬기에 납치가 되었다. 그리고 갑자기 왠지 모를 폭발 사고가 발생해서 원하던 대로 죽었다. 이제 환생하기를 기대하며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눈에는 병실의 풍경만 들어왔다. 팔다리도 여전히 꽁꽁 묶여 있었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한 달간 의도치 않게 고립되어 있었던 나로서는 가족이라는 존재가 꿈에서 만난 것이 전부일뿐, 실제로 어떠한 연락도 주고받을 수 없었다. 그 꿈의 끝자락에 심지어 아내는 아이들을 버려두고 나를 떠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눈앞에 익숙한 표정으로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여주는 아내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기나긴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다섯 살 된 아이가 놀이공원에서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매다가 석양이 질 무렵에서야 엄마를 발견했을 때의 순간처럼 나는 격하게 아내를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대신 아내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내도 나를 보고 눈물을 훔쳤다.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장면처럼, 내가 이동식 침대에 누운 채로 일반 병동으로 이동하는 길에 아내는 내 손을 붙잡고 따라왔다. 여럿이 나를 부축해 병실 침대로 몸을 옮겨 눕혔다. 그리고 아내는 짐을 찾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워야 했는데, 아내와 잠시라도 떨어지는 것이 너무도 두렵고 불안해서 아내의 소맷자락을 꼭 잡기도 했다. <아픈 줄만 알았는데, 고맙습니다>, 선홍, 단해
지금 이 순간, 눈을 감으면 죽음이 본인을 삼켜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함. 바이러스의 잔해들로 한없이 나약해진 신체가 이 싸움을 계속 진행하며 생기는 고단함.
하지만 이것도 알아. 당신이 멋지게 이겨내고, 우리가 힘들게 겪은 시간이 먼 훗날에는 잔인할 만큼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게 될 거라는 걸. 고마워, 살아 돌아와 줘서.
나는 드디어 남편을 40여 일 만에 보호자로 마주할 수 있었다. 아마도 내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이 기억을 마지막으로 추억하고 눈을 감겠구나 하는 순간이었다. 다시 만난 남편의 몸은 사이토카인 폭풍의 여파로 인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여러 부분들이 고장이 나 있었다. 한 달여 가깝게 누워만 있었던 탓에 욕창은 물론 관급식줄, 기관절개 튜브, 항생제 주사줄, 소변줄 등등 몸에는 갖가지 줄들이 연결되어 있었으며 침대에 여전히 팔이 묶여 있는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남편에겐 이미 섬망증상이 오고 있었다. 장시간 마취로 인해 꿈과 현실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며 인지능력 또한 흐려져 갔다. 섬망은 중환자실에 오랜 기간 입원한 환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증상으로 소리를 지르거나 주사기를 빼는 등 과다하게 행동하는 환자들도 있고, 환각증세를 호소하며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는 환자들도 많다고 한다. 남편은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동으로 옮겨질 때 만감이 교차했다고 한다. 일반병동으로 옮겨줄 리 만무하다는 피해의식과 의심이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 하는 기대감도 있었기에 옮겨지는 이동식 침대 위에서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보라색 남방에 청바지를 입은 나를 보고 뜨겁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과연 우리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남편이 의식을 잃기 전 생활치료센터에서 내게 보낸 문자가 있다.
남편은 코로나 중증의 경험으로 인해 여전히 몸에 많은 상처들과 후유증이 남아있다. 그리고 전보다 감수성이 풍부해졌다. 전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남편은 예전에도 눈물이 적지 않은 편이긴 했는데, 훨씬 심해졌다. 그리고 아이들의 커가는 모습을 보며, 이전보다 더 감동하고 자상해졌다. 여전히 우리 가족은 각자의 자리에서 전과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좀 더 치열하게 질문하고 있다.
나와 남편이 겪어낸 경험은 어찌 보면 지독하게 운이 나빠 잊고 싶은 기억일 수도 있지만 여전히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이다. 이 기억으로 인해 익숙하게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사실은 매일같이 새로운 여행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앞으로 나와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 생생하게 꿈꾸고 적극적으로 의미를 추구해 갈 것이다. 그 끝이 비록 누군가 보기에 실패로 끝나 보일 지라도 나를 둘러싼 세상을 이전과 다른 시선으로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며, 더 이상 인생의 숱한 부수적인 것들로 인해 우리의 인생이 결코 좌절되거나 포기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를 오롯이 좇으며 사는 현재가 선물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게 사는 삶은 적어도 나에겐, 우리 가족에겐 후회 없는 삶이 될 것이다.
To be continued
next 6. 1호가 국제학교에 가는 이유
-Why는 항상 How를 이긴다.-
p.s 아래 일러스트는 위의 사진을 보고 첫째 1호가 5학년 때 아이패드로 그린 그림이랍니다.
그리고 아픈 아빠와 병간호하는 엄마를 전지적 본인 시점으로 추가해서 그려 넣어 주었습니다.
언젠가 저 그림의 두 아이는 커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두 아이의 미래가 저도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