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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영 Aug 05. 2023

바람 빠진 풍선이 아닌 탱탱볼


아이와 나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있음을 느꼈다. 처음에는 작은 실금 같은 것이었는데 점차 벌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괜찮을까? 걱정이 되었다. 해결책을 찾을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늘은 금이 얼마나 더 갔는지 두려운 마음으로 확인하는 것뿐이다.

갈피를 못 잡으며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괜찮겠지.’ 하다가 ‘이제 더 이상은 안될 것 같은데’, ‘더 이상은 안돼.’ 하는 마음이 되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한 점에서 시작한 두 선 사이에 작은 각도가 생기면 두 선은 완전히 다른 방향에 이르게 된다. 사람과의 관계도 그와 같아서 조금씩 멀어지다 보면 어느새 다른 곳에 서 있게 된다. 벌어지는 간극을 좁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권영애 소장님의 <존재 육아법> 강의 소식을 들었고 균열을 보수할 기대감으로 강의장으로 향했다. 무엇 때문에 매일 아이와 으르렁거리게 되었는지, 참을 수 없는 화가 왜 이리 치밀어 오르는 것인지, 이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야 했다. 다시 평화롭고 싶었다.

아이와 나 사이에 놓인 실금. 그 실금을 파고든 것은 불안을 먹고 자라는 ‘역할 자아’였다. 역할로만 보게 만드는 녀석. 그 녀석은 우리 사이에 난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와 있는 온 힘을 다해 자기 공간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손톱, 손가락을 넣어 틈을 벌렸을 테고 다리를 넣고 급기야 몸통을 넣었을 것이다. 틈 사이에서 살려고 단단히 버텼다. 녀석도 처음엔 힘들었지만 들어간 이상, 공간을 만드는 건 쉬웠다. 넉넉하게 자리를 차지한 녀석은 어느새 책상과 의자까지 마련해 앉았다. 그렇게 아주 엄격한 감독관이 되었다.


그가 하는 일은 “오늘 해야 할 일 체크”

학생으로서 할 일을 충실히 했는지, 맡은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감독관마다 스타일이 다른데 우리 집에 찾아온 감독관은 해야 할 일을 스스로 하는 것을 좋아했다. 할 일을 다 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노력하지 않는 것은 이해하지 못했다.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참지 못했다. 할 일을 시작했는지, 빠진 것은 없는지 체크했고 미루는 아이를 볼 때, 하기 싫어하며 짜증 내는 모습,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한숨을 쉬었다. 잔소리가 시작되고 언성이 높아졌다.


역할 자아로 볼수록 부족한 모습은 더 선명해지고 확실했다. 아이는 문제투성이가 되었다. 그러자 불안감과 역할 자아의 몸집이 커지고 갈등은 더 심해졌다. 점점 더 벌어지는 관계의 틈을 보며 또다시 불안해했다. 미로 속에서 길을 잃는 처지가 된 것이다. 열심히 출구를 찾아다녀 보지만 내 앞에는 막힌 길, 아까 왔던 길뿐이었다.

잘못 맞춰진 초점은 중요한 것을 놓치게 했다. <존재육아법> 강의는 초점을 다시 맞추는 일이었다. 역할 자아가 아닌 존재 자아로. 그것은 행동이 아닌 몸 안에 있는 진짜 아이, 영혼을 보는 일이었다. 미루는 마음, 하기 싫은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몸을 배배 꼬며 짜증 내는 저 아이는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 어떤 기분일까? 마음으로 느껴보았다. 아이가 이해가 되고 안쓰러웠다.


그런 아이에게 작은 일이라도 해내면 미덕을 찾아줬다. 찾은 것을 말하고 미덕 스티커를 붙여주었다. 미덕을 찾는 나도 받는 아이도 기분이 좋았다.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보였기 때문이다. 하나의 행동에 얼마나 미덕을 꺼내고 있는지, 하루에도 그런 일을 얼마나 많이 해내고 있는지 보였다. 미덕이 쏟아졌다. 대견하게 느껴졌다.


초점을 바꾸자 ‘부족하다’, ‘없다’라고 생각한 것들이 '충분하다', ‘있다’로 바뀌었고 원래 있던 사랑스러운 존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봐주고 쓰다듬어 주자 아이의 영혼과 몸이 춤을 추었다. 춤추다 자기 할 일도 스스로 하기 시작했다. 존재를 바라봐 주자 역할이 손잡고 따라온 것이다. 마법 같은 일이었다.


역할 자아로 바라보던 날의 등굣길, 차에서 내리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우리를 좀 보라고.

아이들의 어깨는 축 처져있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늘어지고 쪼그라져 탁한 얼굴빛을 하고 있었다. 침울하고 무기력해 보였다. 차에서 내려 문을 닫을 때 나는 둔탁하고 힘없는 소리. 그 소리와 무게가 내 몸과 마음에 퍼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더디고 무겁게 했다.


그러나 존재 자아로 살아가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생명의 빛으로 생기가 가득하다. '잘 다녀와'라는 내 인사에 답하는 아이들의 목소리에서 힘이 느껴진다. 차 문을 닫을 때의 당당한 스윙을 느낀다. 탁! 하는 소리를 내며 힘차고 경쾌하게 닫히는 문. 자신만만한 어깨와 걸음으로 교문을 들어서는 아이들을 보인다. 존재 사랑이라는 책가방을 메고 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이다. 마치 탱탱볼 같다. 탱글탱글! 경쾌하고 밝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 자신만의 고유함으로 튀어 오를 준비를 하고 있는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다.

어떤 렌즈로 보느냐에 따라 세상이 달라진다. 마음이 어두울 때, 관계에 균열이 느껴질 때 어떤 렌즈로 바라보고 있는지 확인하고 자아의 눈을 바꿔본다. 그러면 어둡고 불편했던 길에 새로운 길이 생긴다.

모든 사람이 존재 사랑 책가방을 메고 기쁨에 넘쳐 세상에 등교하기를, 뒷모습에서도 빛과 사랑이 느껴지기를 바라본다. 바람 빠진 풍선이 아닌 탱탱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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