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는 말년에 금강산을 여행하였다. 이는 자아의 탐구이자 세계에 대한 탐구다. 즉, 황진이 자신이 「나」를 찾는 과정이며 타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며 무엇보다 외모가 아닌 정신을 존중하는 행동이다.
마치 사업이 망했을 때 자유를 얻어 춤을 추었던 조르바처럼 황진이는 자신의 방랑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자유롭게 춤을 추고 노래하고 시를 썼다. 이것이 황진이의 메토이소노이다. 메토이소노란 「거룩하게 만드는 과정」, 즉 성화(聖化)를 말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작품의 핵심으로 '거룩하게 되기의 개념을 표현한다. 그것은 육체와 영혼, 물체와 정신 등의 모순되는 것에서 하나의 조화를 창출하려는 것으로, 황진이가 스스로 도달하고자 했던 도학적인 정신세계가 바로 메토이소노이며 진정한 자유의 세계이다. 황진이, 그 불굴의 정신인 메토이소노는 유언을 통해서 더욱 진중하게 다가온다.
살아있을 때 열광하던 명사, 사대부들은 그가 죽자 가장 천하게 만드는 일에 열을 올린다.
유언의 진의와 개작과 왜곡
『성옹지소록』에는 ‘죽을 무렵에 집사람에게 부탁하기를, 출상할 때 제발 곡하지 말고 풍악을 잡혀서 인도하라 하였다’ (『성소부부고』/설부3/『성옹지소록』) 고 기록하였고,
『어우야담』에는 「훗날 진이가 병들어 죽을 때가 되자 집안사람들에게 말했다. 나는 살면서 성품이 분방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했소. 죽은 뒤에도 나를 산골짜기에 장사 지내지 말고 마땅히 큰 길가에 묻어주오. 지금 송도의 큰 길가에 진이의 묘가 있다.」(『어우야담』135쪽)고 기록하고 있다. -모두 왜곡된 표현이다. 황진이의 유언의 진의를 상당히 훼손함은 물론 의미마저 타락한 것으로 지칭하고 길가에 묻어달라는 저주까지 기록하여 당시 사대부들의 잘못된 행실을 마치 황진이가 잘못한 것인양 기록하고 있다.
출상할 때에 제발 곡하지 말고 풍악을 잡혀서 인도하라
『성옹지소록』을 근간으로 하여 후대의 글은 개작을 시도한다. 대중의 유교적 질서를 강화하기 위하여 점점 그 표현을 늘려간 것이라 하겠다. 허균의『성옹지소록』(1611)에 수록된 유언은 어느 정도 사실로 본다. 대체로 출상 때에 곡하지 말라는 것과 풍악을 잡혀서 인도하라는 내용이 사실인 것이다.
유몽인의 『어우야담』(1622)은 당시 양반의 인식에 의한 개작이거나 사회의식의 반영으로 야담이 지어졌을 것으로 본다. 위의 두 책에서 황진이는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 남자보다 용감하였고(어우야담), 『성옹지소록』에서는 자신을 송도삼절이라 하여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지존임을 드러내었다. 이에 박연폭포와 서경덕과 황진이는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위대한 존재자를 의미한다.
이는 황진이가 자신의 신념대로 사는 자유인이라는 뜻이다. 꺾을 수 없는 존재인 황진이, 결국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살다간 위대한 작가이며 자유인이며 절대자다. 니코스 카잔자기스의 작품인 『그리스인 조르바』(1946)는 인생의 행복에 관해 물으며 완벽한 자유를 추구하고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 묻는다. 황진이 역시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 구속을 벗어 던지고 자유로운 삶을 통해 구현해 간다.
문제는 훨씬 후대인 남존여비가 극대화된 조선후기에 김택영의 『숭양기구전』(1896)이다. 이 책은 왜곡이 아주 심하여 문제가 된다. 당시 유교적 사고가 공고화된 시점에서 여성에 대한 권계를 목적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에는 남존여비가 극심하여 여성은 물론 남성들에게도 유교적 규범이 필요하였다. 특히 김택영은 황진이가 ‘남자들 자신이 스스로를 아끼지 못 하게 한 장본인’이라고 칭하며, 모든 잘못을 황진이에게 돌리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잘못한 남성들은 유혹에 넘어간 것으로 쓰고 있어 황진이가 잘못한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더구나 온갖 동물이 자신의 살을 파먹게 하는 끔찍한 언사로 황진이의 말로를 기록하여 여성을 규방에 가두는 경계의 본보기로 삼았다. 또한, 이 책은 다른 책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 즉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반성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조선 말기에 어떻게 여성을 구속하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성옹지소록』의 슬픈 유언은 장자의 유언과도 닮아 있다. 장자도 "하늘이 내 무덤이요 동서남북이 나의 관이로다. 자연에서 왔으니 자연으로 돌아가리."라고 유언하였다. 황진이도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도가적 사상을 유언으로 남기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도가사상은 황진이의 스승인 서경덕의 사상이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자신의 시신마저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특히 조선 시대의 문화에서는 시신은 땅에 고이 묻혀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자신의 시신에 대해 도가적 사상을 말한 경우는 드문 것이라 하겠다. 유교 문화에서 도가사상은 대단히 획기적인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정치와 맞지 않고 사상과 맞지 않는 황진이의 유언은 조선 말기에 많이 윤색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윤색이 심한 부분을 빼고 다시 새겨 본다면 특히 개미, 까마귀, 솔개 등의 밥이 되겠다는 것은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의 밥이 되는 존재, 자연에 유익을 끼치는 존재로의 전환이다. 자연을 이용하고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자연의 일부가 되어 유익을 끼치는 승화 사상이다.
그러나 『숭양기구전』은 왜곡이 너무 심하여 문제가 될 것이다. 최근에는 도가사상이 우리의 장례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치면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에 거부감이 없다, 그러나 당시에 자신의 살을 파먹게 하겠다는 것은 저주에 가깝다. 또한 이를 여자들의 경계로 삼게 하라는 것은 심하게 왜곡된 것으로 여성을 집안에 가두고 통제하고자 하는 심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서 이 책은 여성들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더욱 진화하여 사후까지도 지배하고자 하는 의도를 엿보게 한다. 즉 여성들이 즐기며 사는 것은 죄이며 온갖 벌레들이 살을 파먹도록 함부로 두겠다는 것으로 저주에 해당한다. 특히 김택영은 한문학의 대가이며 유교적 사상의 기반을 마지막까지 지킨 사람으로 유교적 한문 저서를 저술한 학자다. 그의 사상으로 미루어 볼 때 그러한 편찬은 항간의 떠도는 일을 사실대로 기록하였다 해도 자신의 지식을 이용한 과거지향적 처사라 할 것이다.
『숭양기구전』에는 「나로 인하여 천하의 남자들이 스스로를 아끼지 못하고 여기에까지 이르렀다. 내가 죽거든 천금으로 싸지도 관을 사용하지도 말고 동문 밖 모래와 물이 만나는 곳에 버려라, 그리하여 땅강아지, 개미, 여우, 삵쾡이들이 내 살을 파먹게 하여 천하의 여자들로 하여금 하나로써 경계를 삼게하라고 했다.
이에 사람들이 그의 유언대로 대로변에 대충 묻었는데 한 남자가 시신을 거두어 다시 묻어주었다. 장단 입구 우물재 남쪽에 그의 무덤이 있다고 기록한다.
이외에도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나 멸절된 그의 자료를 발굴하는 등 앞으로의 연구를 기대한다. 황진이는 기행은 물론 고려속요를 집대성한 학자이자 문(文)과 음(音)을 조화시킨 시인, 살신성인으로 빈민구제에 나선 사회활동가로 기록하고 있는 책도 있다. 그가 자주 고려속요를 즐겨 불렀기 때문이다.
사실 황진이는 수작을 거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진중한 시작(詩作)을 통하여 상대의 심사를 가늠하며 독특한 시 세계를 펼쳐냈다. 즉 즐기고 노는 것은 반대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그는 인생을 재단하는 태생적 운명의 굴레를 벗고 허위와 가식이 득세하던 시대를 이방인으로 살며 파격적인 행동으로 폐쇄적인 신분제도를 조롱했다.
이처럼 황진이는 시대를 앞서간 자유인이라 할 것이다. 그의 신화적이며 거룩한 삶은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