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통 Aug 13. 2024

사람을 관찰하면 삶이 충만해진다

관찰은 주변 사람들을 ‘따로 또 같이’ 또는 ‘홀로 또 함께’로 만들어줘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나혼자 산다>나 <전지적 참견 시점>, <미운우리새끼> 등을 보면 연예인의 사생활 노출이 방송의 줄거리이다. 대중이 만들어준 ‘연예인’이라는 포지션에서 그들의 사생활은 시청자를 빠져들게 하는 방송의 인기 소재가 됐다.

      

시청자들은 방송에서 드러난 출연자의 일거수일투족, 그들의 언행을 좋아한다. 그리고서는 대리만족의 카타르시스에 환호한다. 해당 프로그램의 시청률을 보면 알 수 있다. ‘나혼자 산다’는 평균 시청률이 7%대, ‘전지적 참견 시점’은 3~4%, ‘미운우리새끼’는 최신 시청률이 14.7%이고 최고 시청률 기록은 16.5%를 기록했다. 지상파의 경우 시청률이 3%를 넘게 되면 상위 20위 안에 드는 인기 프로그램으로 평가받는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시초는 몰래카메라(candid camera)라는 설이 있다. 숨겨진 깜짝 카메라를 통해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살피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카메라에 잡힌 현실의 이미지라는 진실함의 부각이 사람들의 관심과 욕구를 충족시켜주어서가 아닌가 싶다.     


나는 연예인보다는 주변에 있는 일반 사람들에게 관심이 더 있다. 저들이 살아온 삶의 과정은 여느 연예인 못지않게 드라마틱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그래서 기회가 주어진다면 보통사람과의 인터뷰를 영상이나 글로 다뤄볼 생각까지 갖고 있다.     


관찰(또는 ‘觀照관조’라고 해도 좋다)의 습관이 그런 계획을 만들었다. TV에 등장하는 연예인의 범주에 속하지 않더라도 주변의 일반인, 길에서 만나는 무명의 평범한 사람들을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 마치 부모형제 같은, 보통의 사람들이 나의 인터뷰이가 되어준다. 직접 대면하지 못하고 관찰에 끝나는, 아직은 일방적 협업이다.     


사업장 주변 동네에는 치기 어린 한 남자가 있다. 인천이 고향인 69년생인데, 하는 일 없이 원룸에서 혼자 거주하면서 기초생활 수급자로 살고 있다. 길에서 만나면 ‘거수경례’로 나의 안부를 묻는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나를 부를 때 ‘핸섬맨’이라고 크게 외친다. 나는 호칭에 대한 대가로 가끔 지폐를 손에 쥐어준다. 그가 먼저 돈을 달라고 하면 오히려 거절한다. 담배가 없을 때 손을 내밀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한다. 덧없이 동네를 배회하는 것이 그만의 루틴이다. 언젠가 그는 어디서 구했는지 까만 백팩을 매고 있길래 물었다. “더운데 왜 백백은 매고 다니나?” 그가 답한다. “생수가 들어있다.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이 안에 있다.” “날이 더운데 생수 정도는 손으로 들고 다녀. 그리고 별 필요한 게 들어있어 보이지 않는데….” 나의 말에 그는 “알었어! 핸섬맨.”이라고 응수한다. 나는 그에게 핸섬맨이고, 나에게 그는 관찰대상이다.     


주중에는 고속철도를 이용해 출퇴근한다. 아침마다 기차 안에서 마주치는 한 아주머니는 나와 같은 역에서 하차한다. 환승을 위해 전철역으로 향하는 것도 같다. 그런데 그는 전철역 개찰구에서 태그하고 입장한 후 바로 뒤돌아 재차 태그를 하고는 개찰구 밖으로 나온다. 전철을 타지 않고 태그만 두 번 하는 게 특이해 보였지만 관찰은 거기까지다. ‘어떤 이유가 있겠거니’로 더 이상의 관심을 차단한다. 허무한 관찰이라고 할 수 있다. 꾸준히 관찰하면 사유가 드러날 것도 같아 기대까지 접지는 않는다.   

  

어느 날 관공서를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아탔다. 목적지를 말하고는 더 이상 택시 안 대화가 사라졌다. 몇 분쯤 가다가 기사가 침묵을 깼다. “세무서는 무슨 일로 가세요?” 목적지에 가는 이유를 궁금해하는 기사가 신기했다. 나는 관찰의 촉을 발동했다. “오늘까지 서류를 접수해야 해서요.”라고 대답했다.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 이상의 대화를 이끌지 않았다. 세무서에 거의 도착할 때쯤 기사가 말을 던졌다. “과거 사업을 할 때 세무조사 때문에 고난이 있었다”고 에둘러 말하면서 “NG 나지 마세요!”라며 나를 배웅했다. 아마 기사는 세무서에 오는 일이 어떤 문제가 있는 방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요번에는 오히려 내가 기사의 관찰 대상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침이면 출근길에 들리는 김밥집이 있다.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40대 후반 아주머니와 친하게 지낸다. 그는 대찬 성격의 소유자다. 그에게 잘 어울릴 정도로 긍정의 삶을 살고 있다. 그에게는 자동차회사를 다니다가 오래전에 비자발적으로 퇴직한 남편이 있다. 지금 남편은 택배 일을 하고 있다. 두 명의 자녀 중 딸은 대기업 반도체공장에 다닌다. 컴퓨터 관련 학과에 다니다가 휴학 중인 아들은 전철역에서 공익근무 중이다. “김밥 말기 알바가 끝나면 오후에는 남편 택배일을 도와요.” 묻지 않았는데도 말 선심을 쓴다. “나는 우리 아들이 이뻐 죽것어요. 얼마나 이쁜지 몰라요!” 그에게 ‘남편은 측은하고 아들은 사랑스럽다’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의 가정은 화목에다 희망까지 더 얹어 가족의 범주에 넣어둔 것 같았다. 그를 보고 있으면 긍정의 ‘오케이’ 사인이 자주 나온다.     


동네에서 꽃가게를 운영하는 60 초반의 부부가 최근 30대 아들을 지병으로 떠나보냈다. 간병으로 오랜 기간동안 꽃집을 열지 못했다. 가끔 가게가 열려있으면 응원차 들어갔는데, 부부의 힘든 기색이 역력해 많이 안쓰러웠다. 조문에 감사하다는 뜻을 전하려고 내가 일하는 사업장에 왔을 때 이렇게 말해주었다. “다사다난한 삶이라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추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핀 꽃과 시든 꽃의 차이는 지금 기쁨을 주는 것과 과거에 기쁨을 주었던 차이입니다. 이제는 고인을 머리 속 생각에서 마음 깊숙한 곳에 옮겨두세요. 자식이 함께 있었을 때 그를 향한 바람이 사라지지 않도록 더욱 열심히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나의 관찰은 힘을 북돋아주는 메시지를 생산한다.     


가끔 만나는 할머니에게는 지팡이 부딪치는 소리가 아가씨의 뾰족 구둣발 음향으로 들려온다고 말해준다. 땀에 젖은 농부의 하얀 셔츠에서는 올바른 향내가 난다고 말한다. 어느 어르신은 타고 있는 사륜 스쿠터를 ‘내벤츠’로 불러달라고 한다. 오래돼 낡은 오토바이를 타는 할아버지는 ‘할리할배’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출퇴근 길에 만나는 무수한 사람들에게는 삶터와 일터가 있다. 두 곳의 왕복은 짧은 당일 여행코스와 같다. 아침 시간이면 목적지에 도착해 두루두루 여행하듯 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여행을 마쳐 피곤한 몸으로 집에 온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을 관찰하고 간혹 그들을 위해 마음속으로 ‘선한 기도’를 해주면 하루짜리 여정은 뿌듯함이 충만해진다.     


세상은 틀에 박혀있어도 정의하기에 따라 ‘여행이냐 일이냐’로 갈려진다. 곳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관찰은 남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재미있다. 주변 사람들이 사는 모습과 나의 인생을 비교하면 삶에 대한 두려움이 작아진다.      


관찰은 나와 주변 사람들을 ‘따로 또 같이’ 또는 ‘홀로 또 함께’라는 시간을 만들어 내놓는다. 좋은 음악이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처럼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조우는 우리에게 미소와 좋은 기분을 피어나게 한다. 그리고 우리가 접하는 세상의 풍광 속에 다른 사람의 모습을 비추어보면 일상의 식상함을 날려보낼 수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