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위한 살짝’은 분명코 몇 번을 읽어도 재밌는 동화처럼 지겹지 않아
며칠 전 동생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17년 3개월을 함께 했던 반려견과의 이별 소식이었다. 무지개다리를 건너간 반려견의 장례식은 성스러워 보였다. 카톡으로 보내온 장례 사진은 묵직하고 엄숙했다.
사진을 보니 반려견은 발목에, 가족 4명은 각자의 손목에 붉은색의 명주실이 묶여 있었다. 장례 관계자가 이 실은 인연의 끈이라고 했다고 한다. 장모의 장례식에서는 추모기간 내내 담대했던 동생의 남편은 반려견과의 이별에서는 넓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고 한다.
사람과 동물의 끈끈한 인연은 에버랜드에서 큰 인기몰이를 했던 국민 판다 푸바오와의 눈물 나는 이별 장면에서도 알 수 있었다. 동생은 먼 미래의 일이지만 오빠 집에서 일어날 반려견과의 이별이 벌써부터 걱정이라면서 전화를 끊었다.
나는 ‘루체’라는, 누런 털에서 빛이 날 것 같은 이름의 토이푸들을 2년 반 전에 입양했다. 우리 집의 첫 번째 반려견인데, 정말이지 심하게 사랑스럽다. 이른 아침마다 나의 폰에서 모닝콜이 울리면 주인보다 앞서 일어난다. 루체는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두 앞다리를 쭉 늘리고, 이어 뒷다리 길게 펴면서 스트레칭을 한다. 언제부터인가 나도 따라서 팔과 다리를 번갈아가며 맨손 스트레칭을 하고 있다. 스트레칭을 마친 루체는 어서 안아달라며 앞다리를 들고서 나에게 달려든다. 이 행동은 아침 인사가 되었고, 이제 그의 루틴으로 자리잡았다.
퇴근 후 집에 오면 짧은 꼬리를 팔랑개비처럼 흔들어댄다. 그리고서는 한 자리에서 빙빙 돈다. 지금 기분이 최고라는 행동학적 특성으로 해석했다. 나는 얼른 루체를 들어 안아준다. 안아주는 시간이 너무 짧다 싶을 땐 루체는 재차 안아달라 재촉한다. 얼른 다시 품에 안아 눈높이를 맞추면 긴 혀를 내밀어 내 얼굴을 핥는다. 뽀뽀하는 것처럼 말이다. 루체의 사랑스러움을 이길, 그 어떤 것도 나는 찾을 수 없다.
반려동물과 사람이 공존하는 문화가 이제는 일상에서 제법 자리를 잡았다. 언젠가 길양이 한 마리의 사진이 어느 신문에 실렸었다. 기사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고양이가 목에 동그란 베개를 하고 있었다. 사진 설명을 보니 그것은 수면 베개가 아니라 ‘보호대’라고 했다. 다친 곳을 핥지 말라고 채워놓았다면서.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한 사람의 정성으로 길양이는 조만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반려동물을 향한 인간의 애정은 집 안팎을 가리지 않는다.
사람은 종종 ‘너를 위하여’라는 사명에 휩싸이고는 한다. 사람과 반려동물 간의 관계야말로 그것이 아닐까 싶다. 주어지는 목적 없이 서로를 위해 준다. 마치 사명감처럼 너를 위해 준다는 것인데, 자신의 존재감은 잊은 채 오직 너만을 위한 삶이 명제처럼 느껴진다. 김남조 시인의 ‘너를 위하여’라는 시에서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의 밤 기도는 길고/ 한 가지 말만 되풀이한다// 가만히 눈을 뜨는 건/ 믿을 수 없는 만치의 축원// 갓 피어난 빛으로만/ 속속들이 채워 넘친 환한 영혼의 내 사람아// 쓸쓸히 검은 머리 풀고 누워도/ 이적지 못 가져본 너그러운 사랑// 너를 위하여/ 나 살거니// 소중한 건 무엇이나 너에게 주마/ 이미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준 사랑만을 기억하리라/ 나의 사람아// 눈이 내리는 먼 하늘에/ 달무리 보듯 너를 본다// 오직 너를 위하여/ 모든 것에 이름이 있고// 기쁨이 있단다 나의 사람아//.’
시인의 밤 기도는 나보다 너를 더 높은 곳에 올려놓았다. 시에서 그려지는 ‘나’는 ‘너’에 대한 사랑을 감추지 않으며 ‘너’를 향하여 사랑을 다 썼다고 할 수 있다. 오직 너만을 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너를 위하는 마음의 무장은 두터운 갑옷처럼 튼실하다.
그것은, 너를 위한 것이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일테면 반려동물한테 마음을 주는 것은 결국 나한테 돌아오는 것이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는 것처럼. 실제로 반려견과 주인이 30분 동안 놀도록 했는데, 주인의 눈을 오래 들여다본 반려견일수록 견주의 옥시토신 분비량이 늘었다고 한다. 옥시토신은 사랑과 행복의 호르몬이다.
물론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너를 위한다면서 나를 위하기 위한 독선 속에 포위되는 경우가 그렇다. 사람이 나를 위하는 것에 집착하게 되면 자신의 삶에서 또 하나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욕심이 마음 속에 지나칠 정도로 과하게 들어있어서다.
너를 위한다는 것은, 갓난아기가 손놀림으로 행여 얼굴에 상처가 날까 봐 보호 장갑을 끼워주는 부모의 마음처럼 순수해야 한다. 인생의 과정은 자기 마음과 참 다르기 마련이다. 뜻대로 되는 것보다 그렇지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마음에 치명적인데, 그래서 그 경우만 기억되기 십상이다. 그것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숙명적인 세상살이가 원인이다.
세상은 타인에 의해 자유가 구속되곤 한다. 사랑도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나의 마음을 그(녀)가 지배한다. 정확하게는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지배를 당하는 것이다. 사랑이 왜곡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순수한 사랑이 우선되어야 할 이유가 된다.
누구는 삶은 뺄셈이라고 한다. 누구는 삶은 덧셈이라고 한다. 덧셈과 뺄셈의 주체가 누구이냐?고 물어도 답은 애매하게 정리된다. 나의 인생이, 나의 사랑이, 나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더해지고 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나를 위하는 것만큼 너를 위하는 것을 중요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누구를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 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처해 있는 처지와 환경에 따라 생각이 달라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바로 ‘공존’의 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남조 시인의 시처럼 너를 위한 것이 나의 기쁨이 된다고 믿어야 한다.
너를 위한다는 것은 우리 인생의 오선지에 도돌이표가 붙어있는 것과 같다. 너를 위하는 것은 결국 도돌이표에 의해 나에게 되돌아온다. 살다 보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왜 없을까.
하지만 ‘살짝 만이라도 너를 위하여’를 기억했으면 좋겠다. 집에서 함께 하는 반려동물, 거리에서 자주 마주하게 되는 길양이, 그리고 주변에 연이 되어 있는 사람들까지, 그들을 살짝 만 위해줘도 기쁨과 평화, 행복이 되돌아온다.
‘너를 위한 살짝’ 안에는 사람에 따라 방대한 모험이 있는가 하면 가슴 뛰는 화음이 요동칠 수 있다. 그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살짝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를테지만, 너를 위하여 살짝 만 내주어도 많은 긍정적인 사건들이 만들어진다.
결국 ‘너를 위한 살짝’은 분명코 몇 번을 읽어도 재밌는 동화처럼, 이미 알고 있지만 반복이 전혀 지겹지 않은 이야기를 만들어줄 것이다. 살짝 만 고개를 돌려도 보이지 않았던 세상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바로 ‘살짝’ 만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