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는 어떻게 분노가 되는가.
르상티망은 언제나 부재에서 시작된다. 누군가가 나를 억압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기대했던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다. 지도교수의 부재는 그런 감정의 대표적인 사례다. 대학원에서 지도교수는 단순한 행정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고, 판단을 잠시 맡길 수 있는 사람이며, 무엇보다 “지금 잘 가고 있다”는 신호를 대신 보내줄 수 있는 존재다. 그래서 지도교수의 부재는 곧 기준의 부재로 이어진다.
문제는 이 부재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을 때 발생한다. 나와 관심주제가 다르다, 다음에 보자는 말들은 모두 사실일 수 있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나의 감정은 사실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나는 점점 이런 질문을 마음속에서 반복하게 된다.
내 연구주제가 충분히 중요하지 않은 걸까
이 정도 고민은 혼자 해결해야 하는 수준일까
나의 불안은 과민한 걸까, 아니면 정당한 걸까
이 질문들은 겉으로는 차분하지만, 안쪽에서는 서서히 방향을 바꾼다.
불안은 곧 비교가 되고, 비교는 곧 평가가 된다.
“다른 사람들은 잘 지도받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혼자 버티는 느낌일까.”
이때부터 감정은 직접적으로 말해지지 못한 분노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지도교수에게 화를 낼 수는 없다.
제도에 항의할 수도 없다. 내가 선택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분노는 안쪽으로 접힌다. 기대에 대한 분노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만들어진다. 즉각 표현되지 못한 감정, 정당하다고 말하기 애매한 기대, 그러나 분명 존재했던 욕구.
“나는 조금 더 봐주길 바랐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신호를 원했다.”
“나는 잘 가고 있다는 확인이 필요했다.”
이 욕구들은 말해지지 않았고, 말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부끄러움으로 바뀌었고, 그 부끄러움은 다시 냉소와 거리 두기의 형태로 변형된다. 그래서 어느 순간 나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어차피 혼자 해야 하는 거지.”
“지도라는 게 다 그런 거지.”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없다.”
이 말들은 성숙해 보이지만, 사실은 기대가 좌절된 뒤에 만들어진 방어 문장이다. 르상티망은 언제나 이렇게
‘초연함’과 ‘자기 합리화’의 얼굴을 쓰고 나타난다. 그리고 이 감정은 마데이의 형태로 다시 표면에 떠오른다. 사소한 선택에서 과도하게 흔들리고, 작은 좌절에 크게 무너지고, 하루 전체가 나를 밀어내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
그날의 커피, 꿀빵, 버스는 사실 지도교수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감정은 이미 다른 곳에서 균형을 잃고 있었고, 마데이는 그 균열이 드러난 하루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지도교수의 부재는 나를 무너뜨린 사건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인정과 방향을 갈망하고 있었는지를 뒤늦게 드러낸 장면이었다.
르상티망은 누군가를 미워해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다. 르상티망은 기대했지만 말하지 못했고, 기다렸지만 확인받지 못한 마음이 다른 형태로 살아남은 흔적이다. 그리고 마데이는 그 흔적이 가장 솔직하게 드러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