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마구니데이를 끝내는 문장

by NaeilR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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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의 마구니데이가 지나갔다. 커피 가격은 또다시 990원으로 돌아왔고, 꿀빵은 다시 진열될 것이고, 버스는 내일도 온다. 사건들은 늘 그렇게 정리된다. 문제는 사건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남아 있는 감정이었다.


이번에 찾아온 마구니데이는 과거의 그날에 비해 오래 지속될 것 같다. 한차례의 지도교수 선정 실패 이후 또 한 번의 시련이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시련은 '연구의 방향을 함께 잡아줄 사람을 찾는 과정'이 반복해서 막히는 경험이었다. 첫 번째 선정 실패 이후 3일을 앓아누웠었다. 하지만 두 번째의 선정 실패는 ‘그저 그런 느낌’이다. 나는 이미 원인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도교수가 정해지기 전까지 내 감정의 상처는 지속될 것 같다.


내가 마데이심리학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단순했다.

“왜 나는 이렇게 쉽게 흔들리는가.”


하지만 쓰다 보니 질문이 바뀌었다.

“나는 무엇을 그렇게 오래 참아왔는가.”


나는 마구니데이 초반에는‘하루의 구조’로 해부했다. 고민이 커지고, 기대가 굳어지고, 작은 좌절이 과장되고, 타협이 실패하고, 분노가 터지고, 수용이 찾아온다. 그 흐름은 사건의 순서가 아니라 감정의 에너지 흐름이었다. 마구니데이는 불운이 아니라 내 마음의 체력과 기대의 높이가 드러나는 날이었다.


이후 나는 더 깊은 층위를 보게 됐다. 마구니데이의 분노는 그날의 커피 때문이 아니었다. 그 분노는 즉시 말하지 못한 감정이 늦게 도착한 형태였고, 그 형태는 르상티망이라는 이름을 가질 만했다. 르상티망은 누군가를 미워해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다. 기대했지만 말하지 못했고, 기다렸지만 확인받지 못한 마음이 다른 얼굴로 살아남은 흔적이었다.


여기서부터 마구니데이는 하루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습관이 된다. 사건은 작고, 감정은 크다. 그 차이가 나를 고장 나게 만든다. 앞으로도 마구니데이는 계속 나를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날을 단순히 “운이 나쁜 날”로 부르기보다 원인을 먼저 분석할 것이다.


내가 이 연재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결론은 마구니데이를 없애기 위한 목표가 아니다. 앞으로도 계속 찾아올 반복의 방식이 바뀔 수 있다는 성찰이다. 앞으로도 계속 찾아오고 반복될 이 굴레를 바꾸는 조건은, 감정을 없애려는 태도를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늘 이렇게 말한다.


“예민해지지 말자.”

“참자.”

“별일 아니야.”


그 말들이 가장 위험한 이유는, 감정을 작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지연시키기 때문이다. 표현되지 못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더 늦게, 더 비틀린 얼굴로 돌아온다. 그래서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괜찮아지는 것”이 아니라 “번역하는 것”이다. 지금 느끼는 불쾌가 무엇에서 왔는지, 그 감정이 어떤 결핍을 가리키는지, 내가 어떤 기대를 말하지 못했는지. 감정은 제거해야 할 찌꺼기가 아니라 해석해야 할 기록이다.


나는 다음 마구니데이가 왔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아주 짧은 절차를 만들었다. 복잡한 방법이 아니다. 단지 감정이 나를 덮치기 전에, 내가 먼저 감정을 붙잡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첫째, 멈춘다.

“지금의 감정은 오늘의 사건인가, 이전의 잔상인가.”


둘째, 이름을 붙인다.

“나는 지금 화가 난 게 아니라, 기대가 비어 있었다.”

“나는 지금 짜증 나는 게 아니라, 확인받지 못한 마음이 남아 있다.”


셋째, 한 문장을 고른다. 그 문장은 문제를 해결하는 문장이 아니라, 나를 나에게 되돌리는 문장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지금은 해결이 아니라 해석이 필요한 순간이다.”

“나는 예민한 게 아니라, 이미 오래 참았다.”

“오늘은 나를 몰아붙이지 않아도 된다.”


이 세 단계가 마구니데이를 없애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날의 하루가 나를 통째로 잡아 삼키는 방식은 바꿀 수 있다. 나는 적어도, 감정이 나를 대신 말하게 두지 않을 수 있다. 마데이심리학을 쓰며 가장 많이 바뀐 것은 ‘나를 평가하는 방식’이었다. 예전의 나는 흔들리면 스스로를 비난했다.


“왜 이렇게 사소한 일에 흔들려.”

“왜 이렇게 마음이 약해.”

“왜 나는 정상적으로 하루를 시작하지 못해.”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흔들림은 결함이 아니라 신호다.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어디에서 인정이 필요한지, 어떤 기대가 무너졌는지. 마구니데이는 그 신호가 드러나는 방식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 연재를 끝내는 문장을 하나 남기고 싶다. 이 문장은 마구니데이를 종결짓는 선언이 아니라, 다음에 다시 찾아올 그날 덜 아프게 통과하기 위한 문장이다.


사건은 끝나도 감정은 끝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감정을 없애려 하지 않고, 감정이 왜 늦게 도착했는지를 이해하려 한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마구니데이는 다시 시작될 수 있다. 커피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꿀빵이 아니라 더 작은 것으로, 버스가 아니라 더 무심한 말 한마디로. 하지만 이제 그날의 세계가 나를 특별히 미워해서가 아니라, 내가 오래 참아온 마음이 어느 순간 의미를 요구하기 때문에 마구니데이가 나를 찾아온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를 요구하는 목소리에, 나는 이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래, 늦게 와도 괜찮다. 이번에는 내가 너를 무시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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