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결정권을 확인하는 의식

컨펌은 왜?

by NaeilRnC

회사에는 문서적 생명이 있다. 문서적 생명은 칠전팔기 이상의 생명력을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컨펌”이라고 부른다. 후인은 오늘도 파일명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하루를 시작했다.

이게 진짜 최종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v12_최종_진짜_최최종.


아침 9시 12분, 부장이 말했다.

“후인씨, 이거 오늘 안에 클라이언트 보내야 해. 컨펌만 받으면 돼.”


컨펌만. 후인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번역한다.

“컨펌만 = 지금부터 네 하루는 내 거.”


후인은 문서를 열었다. 어젯밤 만들었던 보고서였다.

표, 그래프, 문장, 각주, 출처. 사람이 정성 들여 만든 문서는 티가 난다.

특히 회사에서는 그 티가 곧 “더 시켜도 되겠다”로 읽힌다. 첫 번째 컨펌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부장: “좋네. 근데… 말투 좀 더 부드럽게.”

후인: “어떤 부분을요?”

부장: “전체적으로.”


후인은 ‘전체적으로’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명확한 지시를 할 필요가 없고, 책임을 질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후인은 문장 끝을 깎았다.


“~입니다.”를 “~로 보입니다.”로 바꾸고,

“필요하다”를 “필요할 수 있다”로 바꾸고,

“문제다”를 “판단된다”로 바꿨다.


말이 부드러워질수록 내용은 흐릿해졌다. 회사에서의 부드러움은 대개 진실을 희석하는 기술이다.

11시 03분, 두 번째 컨펌이 왔다.

부장: “근데… 클라이언트가 너무 딱딱한 거 싫어하잖아. ‘감성’ 좀 넣자.”

후인: “감성이요?”

부장: “응. ‘스토리’ 같은 거.”


후인은 속으로 되뇌었다. 스토리는 작가가 쓰는 거고, 보고서는… 왜?

회사에서는 스토리를 좋아한다. 그리고 보고서와 스토리 사이의 “깔끔함”을 강조했다.

후인은 억지로 감성을 넣었다.

“본 과업은 지역 주민의 역량강화 및 진정한 지방자치 실현을 위해 필요하며, 이를 통해 지역 주민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 문장은 회사에서 쓰는 고전적 감성이다. 아무도 반박할 수 없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점심 12시 47분, 세 번째 컨펌이 왔다.

부장: “그래프 색 바꿔. 지금 너무 튀어.”

후인: “어떤 색으로요?”

부장: “안 튀는 색.”


후인은 ‘안 튀는 색’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건 색이 아니라 태도다.

사람도 안 튀어야 하고, 문서도 안 튀어야 한다. 하지만, 흑백 인쇄를 했을 때 확실한 구분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후인은 회색을 올렸다. 그래프도 회색, 문장도 회색, 후인의 기분도 회색.


그런데 여기서 끝나면 회사가 아니다.

오후 3시 21분, 단체 채팅방이 울렸다.

클라이언트: “방금 내용 봤는데요. 전체적으로 좀 더 강하게 써주세요. 너무 무난해요.”

부장: “네! 반영해서 더 임팩트 있게 수정드리겠습니다!”


부장의 ‘네!’는 정말 밝았다. 밝은 사람이 일을 밝게 가져가진 않는다. 밝은 사람은 일을 남에게 밝게 넘긴다. 부장이 후인을 불렀다.

“후인씨, 클라이언트가 강하게 써달래. 근데 너무 세게 쓰면 또 싫어해. 알지?”

후인: “…그러니까 그… 강한데 부드럽게. 임팩트 있는데 무난하게.”


강한데 부드럽고 임팩트가 있지만 무난한 문장. 그런 게 있을까?

후인은 문서를 다시 열었다. 아침에 “문제다”를 “이슈로 판단된다”로 바꿨던 걸 되돌렸다.

그런데 그대로 쓰면 안 된다. 강하게 쓰되, 누가 책임질지는 흐리게 해야 한다. 그래서 후인은 이렇게 썼다.

“현행 체계는 구조적 한계를 내포하고 있어 개선이 요구된다.”


강해 보이지만 아무도 특정하지 않는다. 구조는 맞고, 책임은 없다. 회사가 좋아할 만했다.

오후 6시 04분, 부장이 말했다.

“좋아. 이게 최종이야. 이제 보내자.”


후인은 저장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보냈다. 10분 뒤, 부장이 다시 말했다.

“아… 근데 마지막 페이지에 로고 위치 좀… 3픽셀만 올려.”


후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사람이 되고, 침묵하면 직원이 된다.

그날 후인은 마지막으로 문서를 저장하며 생각했다.

컨펌은 품질 관리가 아니라, 누가 결정권자인지 반복해서 확인하는 의식이라는 걸.

그리고 그 의식의 비용은 늘 같은 사람이 낸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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