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는 결론이 아니라 서열을 정한다
회의는 결론을 내리는 자리라고 배웠다.
하지만 회사에서 회의는 대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회의는 사람을 정리한다.
누가 말해도 되는지, 누가 말하면 안 되는지, 누가 웃어야 하는지, 누가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지.
회의는 그걸 결정한다. 후인은 회의실에 들어가자마자 분위기부터 확인했다.
분위기는 늘 먼저 말한다. 오늘은 누가 맞는 날인지.
부장이 일찍 와 있었다. 그건 보통 좋은 징조가 아니다.
일찍 온 부장은 준비한 게 아니라 잡아먹을 게 많다는 뜻이다.
“자, 시작하자.”
부장이 화면을 띄웠다. PPT 첫 장은 언제나 그렇듯 ‘요약’이었다. 요약은 짧았다. 대신 표정이 길었다.
“이번 프로젝트, 클라이언트가 좀 예민해. 그러니까 다들 말 조심하고.”
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조심하라는 말은 ‘사실을 조심하라’는 뜻일 때가 많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부장이 말했다.
“일단 결론부터. 이번 달 실적, 우리가 책임져야 해.”
‘우리가’라는 단어가 나왔다. 회의에서 ‘우리’는 늘 아름답다.
하지만 문제가 터지면 ‘우리’는 항상 너로 바뀐다.
대리가 발표를 시작했다. 숫자를 읽고, 흐름을 설명하고, 원인을 조심스럽게 정리했다.
그런데 원인을 말하는 순간, 회의는 숫자에서 권력으로 넘어간다.
“음… 이 부분은 일정이 촉박했고, 인력 배정이—”
부장이 말을 끊었다.
“잠깐. 일정이 촉박한 건 핑계지. 우리가 촉박하게 만들었어?”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우리가’가 이번엔 칼처럼 나왔다. 대리는 웃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외부 요청이 계속 바뀌어서…”
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외부 요청이 바뀌는 건 늘 있는 일이야. 그걸 처리하는 게 우리 일이잖아.”
이 말은 그럴듯했다. 회사는 이렇게 말한다. 문제는 늘 있다. 그러니까 문제를 문제라고 하지 마.
후인은 그 문장을 머릿속으로 적었다. 회의는 기록이 아니라 생존이기 때문이다.
부장이 갑자기 후인을 보더니 물었다.
“후인씨, 이거… 왜 이렇게 했어?”
후인은 화면을 봤다. 자기 자료가 아니었다. 인턴이 만든 그래프였다.
하지만 후인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회사에서 이름은 권리가 아니라 책임의 배달표다.
후인은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
“인턴이 초안을 만들었고, 저는 전체 구조만 맞췄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회의실의 시선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인턴’이라는 단어는 회사에서 두 가지로 쓰인다. 귀여운 존재, 책임을 떠넘기기 좋은 존재.
부장이 말했다.
“인턴이 만들었으면, 더 봐야지. 검수는 누가 해?”
후인은 대답을 바로 하지 않았다.
대답을 빨리 하면 약해 보이고, 늦게 하면 건방져 보인다. 회의에서 타이밍은 논리보다 중요하다.
후인은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검수는 부장님 승인 포함해서 단계가 있습니다. 현 단계에서 오류가 보이면, 수정해서 다시 올리겠습니다.”
부장은 “그래”라고 말했지만, 그 말은 동의가 아니었다. 회의에서 “그래”는 보통 이런 뜻이다.
너는 말이 많다. 그때 부장이 갑자기 웃으며 말했다.
“아, 근데 말이야. 회의는 길게 하지 말자. 결론 내자.”
후인은 웃음이 날 뻔했다. 방금까지 결론을 미루던 사람이 결론을 내자고 했다.
회의에서 결론은 종종 논리의 끝이 아니라, 권력자의 피로에서 나온다. 부장이 결론을 말했다.
“자, 그럼 이렇게 하자. 오늘 안에 수정본 보내고, 문제 생기면 현장 가고, 클라이언트가 뭐라 하면 일단 우리가 죄송하고, 원인 분석은 나중에 하자.”
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 결론은 늘 단순했다. 단순한 결론을 만들기 위해 회의는 그렇게 오래 걸린다.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나가려는 순간, 부장이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던졌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이런 실수 없게. 다들 좀 책임감 있게.”
다들. 후인은 그 단어가 참 공평하게 들린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회의가 끝나면, 그 공평함은 늘 한 사람에게만 착지한다.
회의실 문이 닫히고, 사람들은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회의는 끝났지만 서열은 남았다.
회의에서 결정된 건 업무가 아니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순서였다.
후인은 자리로 돌아와 문서를 열었다. 수정해야 할 건 그래프가 아니라 구조였다.
하지만 구조는 수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후인은 할 수 있는 것부터 했다.
로고 위치를 바꿨다. 회사에서 가장 확실히 바뀌는 건, 늘 그런 것들이었다.
그날 후인은 메모장에 이렇게 적었다. 회의는 결론을 내리는 자리가 아니다.
회의는 누가 결론을 내릴 수 있는지 확인하는 자리다. 그리고 그 확인이 끝나면, 일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