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한 글자의 폭력

단톡방의 공포 : ‘ㅇㅇ’의 의미

by NaeilRnC

단톡방에는 말이 있고, 의미가 있고, 그리고 전염이 있다. 단톡방은 정보 전달 도구가 아니라 감정 전달 도구다. 특히 회사 단톡방은 감정 중에서도 거의 한 가지만 전달한다.

불안.

후인은 알았다. 회사 생활에서 가장 먼저 익혀야 하는 건 보고서가 아니라 단톡방 언어라는 걸.

그중에서도 최상위 난이도는 이거였다.

“ㅇㅇ”

겉으로는 짧다. 짧다는 건 선해 보인다. 하지만 회사에서 짧은 말은 대개 칼이다.


1) “ㅇㅇ”은 ‘네’가 아니다


후인이 입사 초기에 가장 착각했던 게 있었다.

‘ㅇㅇ’은 그냥 “응”이겠지. 친근하게 동의하는 거겠지. 아니다. 회사에서 ‘ㅇㅇ’은 대부분 이렇게 번역된다.

“닥쳐.”, “바빠.

동의가 아니다. 지시를 최소한의 에너지로 마쳤다는 표시다. 그리고 최소한으로 말하는 사람은 대개 권력이 있다.


2) ‘ㅇㅇ’의 위험은 말줄임이 아니라 감정 삭제다


후인은 부장에게 보고했다.

후인: “자료 취합 완료했습니다. 최종본 올리겠습니다.”

부장: “ㅇㅇ”


후인은 잠깐 멈췄다. “확인했습니다”도 아니고 “수고했어요”도 아니고 “좋아요”도 아니다. 그냥 ‘ㅇㅇ’이다.

이 말에는 온도가 없다. 온도가 없다는 건 평가가 없다는 게 아니라, 평가가 말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회사에서 평가가 말로 전달되지 않으면, 평가는 다른 경로로 온다. 대개는 인사고과 같은 형태로.


3) ‘ㅇㅇ’은 상황에 따라 다른 무기가 된다


후인은 단톡방에서 ‘ㅇㅇ’의 변형들을 배웠다.

ㅇㅇ : 알았음(대부분: 알아서 해)

ㅇㅇㅇ : 더 짜증남(대부분: 왜 아직 안 됐어)

ㅇㅋ : 기분 좋을 때의 허락(하지만 흔치 않음)

ㅇ : 위험(단호함 + 불쾌함)

ㅇㅇ.. : 공포(실망, 판단, 보류)

후인은 특히 “ㅇ”을 두려워했다. 한 글자. 한 글자의 폭력. 한 글자는 설명이 없다.

설명이 없다는 건 다음 행동의 책임이 전부 상대에게 넘어간다는 뜻이다.


4) 단톡방은 ‘관계’를 만든다. 아주 나쁜 방식으로


후인은 단톡방을 보면 그날의 서열이 보였다.

부장이 “ㅋㅋ”를 많이 쓰는 날: 오늘은 누군가 덜 맞을 가능성이 있다.

부장이 “ㅇㅇ”만 쓰는 날: 오늘은 누군가 맞을 가능성이 크다.

부장이 “콜”을 쓰는 날: 본인은 기분이 좋다(대개 남의 야근으로).

부장이 “확인”을 쓰는 날: 문서가 아니라 사람을 확인한다.

단톡방에는 표정이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표정을 상상한다. 그리고 상상은 대개 최악으로 간다.

후인은 단톡방을 열 때마다 부장의 표정을 자동으로 합성했다.

그 합성이 반복되면, 실제 표정을 보기 전부터 사람은 먼저 위축된다.

단톡방은 사람을 훈련시킨다. 미리 움츠리게 만들고, 미리 사과하게 만들고, 미리 야근하게 만든다.


5) ‘ㅇㅇ’이 가장 무서울 때는, 내가 ‘ㅇㅇ’만 치고 싶어질 때다


어느 날 후인은 인턴에게 메시지를 받았다.

인턴: “선배님, 이 표 이렇게 하면 될까요?”

후인의 손가락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ㅇㅇ

그때 후인은 멈췄다. 자기도 모르게 회사 언어를 흉내 내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감정을 삭제하고 있었다.

후인은 ‘ㅇㅇ’를 지웠다. 그리고 대신 이렇게 썼다.

“지금 방향 맞아요. 다만 이 항목은 기준을 한 줄만 더 붙이면 더 안전해요. 제가 5분만 같이 볼게요.”


보내고 나서 후인은 잠시 폰을 내려놓았다. 단톡방의 언어는 전염된다.

그 전염을 끊으려면, 누군가는 의식적으로 다른 언어를 써야 한다.

그게 후인에게는 이상하게도 작은 구원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부장이 단톡방에 올렸다.

“내일 아침 9시까지 수정본. 가능?”

대리가 답했다. “넵!”

인턴이 답했다. “네!”


후인은 잠깐 멈췄다가 이렇게 썼다.

“가능합니다. 다만 변경 요청 범위만 확정해주시면, 정확히 맞춰서 올리겠습니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부장이 답했다.

“ㅇㅇ”


후인은 폰을 내려놓고 생각했다. 단톡방에서 ‘ㅇㅇ’은 말이 아니라 기싸움의 최소 단위다.

그 최소 단위가 쌓이면 사람은 어느 날 자기 자신에게도 ‘ㅇㅇ’만 남기게 된다.

그게 가장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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