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야근은 능력이 아니라 문화

책임과 죄책감만 남는 설계

by NaeilRnC

회사는 말한다.

“우린 야근을 강요하지 않아.”


정확히 말하면, 회사는 야근을 강요하지 않는다. 회사는 야근을 전제한다. 전제는 강요보다 더 무섭다.

거기에는 늘 “선택권이 있었다”는 표정이 붙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4시 58분, 부장이 후인을 불렀다.

“후인씨, 이거 오늘까지 가능하지?”


후인은 화면을 봤다. 오늘까지 가능한 일이었다. 단, 조건이 하나 있다. ‘오늘’이 회사의 오늘일 경우에만.

회사에서 오늘은 하루가 아니다. 클라이언트가 잠들기 전, 부장이 집에 가기 전, 문제가 터지기 전.

그러니까 보통 밤이다. 후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업무시간 내’ 기준인가요, 아니면 ‘오늘 밤’까지인가요?”


부장이 웃었다.

“이런 거 묻는 거 귀엽다. 그냥… 오늘.”


귀엽다. 회사에서 “귀엽다”는 네가 지금 회사 언어를 못 알아듣는다는 뜻이다. 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야근이 확정됐다. 야근은 갑자기 오지 않는다. 야근은 늘 예고되어 있다.

예고는 이런 식이다.

“오늘은 조금만 더 보자.”

“마감이 좀 당겨졌대.”

“클라이언트가 좀 예민해서.”

“이거 한 번만 더 다듬자.”


이 문장들은 모두 같은 뜻이다. 집에 가지 마. 야근의 시작은 대개 회의다.

5시 30분, 부장이 갑자기 회의를 소집한다.

“다들 잠깐만 모여.”


잠깐. 회사에서 “잠깐”은 1시간 이상이다. 회의는 늘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우리 오늘 안에 끝내자. 다 같이 힘내자.”


‘다 같이’라는 말이 나왔다. 후인은 마음속으로 체크했다. 오늘의 야근 담당자는 누가 될까.

대개는 말이 적고, 일을 잘하고, 반박을 덜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후인이다.

회의가 끝날 즈음 부장이 말했다.

“자, 역할 나누자. 후인씨는 전체 취합. 대리는 자료 정리. 인턴은 표 입력.”


여기서 “전체 취합”은 무엇인가. 표로는 한 줄이지만 현실로는 한 사람의 밤이다.

전체 취합은 작업이 아니라 책임이다. 취합하는 사람은 마지막에 욕도 같이 취합한다.

야근은 업무량이 아니라 설계다. 후인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수정이 들어왔다.

“이 문장 너무 세다. 순화해.”

“아니, 너무 약하다. 강하게.”

“표 위치 바꿔.”

“그래프 색은 안 튀게.”


후인은 깨달았다. 일이 많아서 야근하는 게 아니다. 일이 끝나지 않게 설계돼 있어서 야근하는 거다.

끝을 내면 다음 일을 줘야 한다. 끝을 안 내면 “지금 하고 있다”를 유지할 수 있다.

회사는 완성보다 지속을 좋아한다. 지속은 곧 통제다. 야근 문화의 핵심은 죄책감이다.

밤 9시, 후인의 옆자리 대리가 가방을 들었다. 대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오늘 애가 열이 있어서…”

부장은 웃으며 말했다.

“어, 가. 당연히 가야지.”


순간 사무실의 기류가 바뀌었다. 부장은 웃었지만, 웃음은 “가”가 아니라 “기억할게”였다.

대리가 나가자 부장은 후인을 봤다.

“후인씨, 우리 이거 오늘 끝내야 하는 거 알지?”


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후인은 알았다.

야근 문화는 “남아라”가 아니라 “가면 네가 미안해져”로 굴러간다는 걸.

회사에서 가장 강력한 통제 장치는 감시가 아니라 죄책감이다. 밤 11시 40분, 부장이 말했다.

“좋다. 다 됐다.”

“고생했어. 이런 게 우리 팀워크지.”


후인은 웃었다.

웃긴 건 팀워크가 아니라 후인의 시간이 사라졌다는 건데도, 그 말이 예의처럼 들렸다는 것이다.

부장은 12시 10분에 퇴근했다. 후인은 12시 13분에 퇴근했다.

3분.

그 3분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는 기록이다. 회사에서 기록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집에 돌아온 후인에게 메시지가 왔다.

부장: “아, 방금 클라이언트가 한 가지 더. 내일 아침에 반영 가능?”


후인은 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봤다. 내일 아침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내일 아침이 벌써 쓰였다.

그때 후인은 아주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야근은 능력이 아니라 문화다.

그리고 문화는 개인의 의지로 끊기 어렵다. 다 같이 동의한 적도 없는데, 다 같이 따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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