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하는 척의 기술
회사는 “열심히”를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회사는 열심히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열심히 보이는 것을 좋아한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피곤해지고, 열심히 하는 척하는 사람은 오래 산다.
후인은 그 사실을 너무 늦게 배웠다. 아니, 너무 늦게 믿었다.
그날 아침, 부장은 커피를 들고 와서 말했다.
“요즘 다들 힘들지? 근데 이럴 때일수록 ‘티’가 나야 해. 우리 태도부터 보여줘야지.”
태도. 회사에서 태도는 결과물이 아니다. 태도는 표정과 출근 기록이고, ‘자리’다. 사람이 아니라 자리.
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건 회사의 공용 언어다. 뜻은 이렇다. 당장 반박은 안 하겠습니다.
부장이 이어서 말했다.
“일단 오늘은 야근 각오하고 가자. 다들 커밋 좀 하자.”
커밋. 후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커밋은 개발자들이 하는 거다.
우리는 보고서 쓰는 사람이고, 회사는 단어를 섞어 쓰면서 ‘일하는 느낌’을 만든다.
느낌은 KPI가 되고, KPI는 밤을 먹는다.
후인은 컴퓨터를 켰다.
메일함엔 클라이언트 메일, 내부 수정 요청, ‘긴급’ 표시, 그리고 단톡방 메시지가 있었다.
“후인씨, 방금 자료 하나만 더. 금방이야.”
금방. 회사에서 “금방”은 대개 이런 뜻이다. 오늘 끝나면 다행, 내일 아침에 다시 바뀜, 나중엔 네 탓.
후인은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일이 끝나지 않는 방식 때문이었다. 끝이 없다기보다, 끝을 내면 그 끝이 곧바로 다음 일을 부르는 구조. 완성이 휴식이 아니라 호출로 바뀌는 구조. 그때 옆자리 대리가 슬쩍 말했다.
“야, 너 너무 진짜로 열심히 하지 마.”
후인은 웃었다. 웃음은 작게 났지만, 마음은 크게 울렸다.
“그럼 어떻게 해요.”
대리는 아주 조용히, 그러나 전문가처럼 말했다.
“열심히 하는 척을 해야지. 진짜 열심히 하면 진짜로 다 너한테 온다.”
그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위로가 됐다는 사실이 더 슬펐다. 후인은 그날부터 새로운 기술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회사 생존의 고급 스킬, 열심히 하는 척. 가장 먼저 손댄 건 ‘일’이 아니라 ‘소리’였다. 키보드 소리는 업무량이 아니라 존재감이었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조용히 하고, 열심히 하는 척하는 사람은 소리를 낸다.
후인은 일부러 엔터를 조금 더 세게 눌렀다.
딱. 딱. 딱.
소리가 사무실에 박히자 누군가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후인은 표정을 굳혔다.
‘어렵습니다’가 아니라 ‘몰입 중입니다’로. 회사에서 몰입은 증명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몰입을 표정으로 연출한다. 표정이 먼저고, 성과는 나중이다. 나중은 늘 실무자 몫이다.
그다음은 화면이었다. 진짜 일하는 사람은 파일 하나만 열어놓는다.
열심히 하는 척하는 사람은 탭을 열 개 띄운다.
후인은 엑셀, 보고서, 자료집, 메일, 통계청 사이트, 그리고 아무 의미 없는 PDF까지 띄워놨다.
탭이 많으면 바쁘게 보인다. 바쁘게 보이면 누군가 함부로 “빨리 해”라고 말하기가 조금 어려워진다.
회사에서 바쁨은 방패다. 방패는 맞는 걸 막지 못한다. 다만 누가 때릴지 잠깐 망설이게 만들 수는 있다.
그리고 말투. 열심히 하는 척의 핵심은 결과가 아니라 진행이었다. 회사는 완성보다 진행을 좋아한다.
완성은 다음 일을 부르기 때문이다. 후인은 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 지금 잡고 있습니다.”
“네, 지금 반영 중입니다.”
“네, 지금 전체 흐름 다시 보고 있습니다.”
“지금”은 마법의 단어다. 책임을 묶되 결론을 유예한다. 유예는 회사에서 가장 안전한 시간이다.
길어질수록 위험해지지만, 적어도 당장 죽진 않는다.
마지막은 퇴근이었다.
열심히 하는 척의 마지막은 ‘퇴근’이 아니라 ‘퇴근 직전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후인은 6시에 컴퓨터를 끄지 않았다. 6시 10분에도, 6시 25분에도, 6시 40분에도 앉아 있었다.
그 사이 실제로 한 일은 많지 않았다. 대신 “남아 있는 모습”을 남겼다.
사무실에서 “남아 있는 사람”은 성실하고, “정시에 나가는 사람”은 쿨하고, “먼저 나가는 사람”은 애매해진다.
후인은 6시 42분,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리도 천천히 했다. 파일 저장도 한 번 더 했다.
저장의 반복은 회사에서 일의 깊이처럼 보이니까. 그날 밤, 단톡방에 부장이 메시지를 남겼다.
“오늘 다들 고생했다. 이런 때일수록 팀워크야.”
팀워크. 후인은 침대에 누워 그 단어를 생각했다. 팀워크는 보통 누군가의 야근 위에 세워진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늘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 후인은 “열심히 하는 척”을 했다.
놀랍게도 마음이 덜 닳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적응은 성장일 수도 있고, 타락일 수도 있다. 둘은 늘 같은 얼굴로 온다.
후인은 눈을 감으며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열심히 하는 척을 배우면 살아남을 수는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살아남는다는 게 내 인생을 산다는 뜻은 아니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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