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초안만 빨리"

임시가 최종이 되는 구조

by NaeilRnC

회사에서 초안은 초안으로 끝나지 않는다. 초안은 대개 최종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최종이 되면 책임도 최종이 된다. 부장이 말했다.

“후인씨, 일단 초안만 빨리 줘. 회의에서 대충 던질 거야.”


대충 던질 거야. 후인은 그 말을 믿었다. 믿는 순간부터 회사는 편해진다. 후인은 밤새 초안을 만들었다. “대충”이라는 말에 맞춰 완성도를 낮추려 했지만, 손이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은 대충을 잘 못한다. 특히 책임을 많이 맞아본 사람은 더 그렇다. 대충 내면 맞을까 봐, 결국 정성 들인다.


다음날 회의에서 부장은 그 초안을 화면에 띄웠다.

“이 방향으로 가겠습니다.”


후인은 멈칫했다. ‘방향’이 확정됐다. 초안이 합의가 됐다. 회의가 끝나고 클라이언트가 말했다.

“그럼 이대로 진행하죠. 일정은 당겨서요.”


그 순간 후인은 알았다. 초안은 인질이 됐다. 인질이 되면, 수정은 협의가 아니라 “지연”이 된다.

후인은 부장에게 말했다.

“그건 초안이라, 검수와 수치 확인이 필요합니다.”


부장은 가볍게 답했다.

“알지. 근데 이미 던졌잖아. 이제 맞춰야지.”


던졌다. 회사에서 던진 건 공이 아니라 책임이다. 후인은 그날부터 “초안”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받지 않기로 했다. 초안을 주는 순간, 초안이 최종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문장을 붙였다. 초안을 ‘자료’가 아니라 ‘조건부 가설’로 고정하는 문장.


후인이 만든 “초안 인질화 방지” 문장 9개


“1차 초안 공유드립니다. 본 문서는 미확정(가안)이며, 승인 전 외부 공유는 지양 부탁드립니다.”

“초안은 방향 논의용이며, 수치/표/문구는 검수 후 확정됩니다.”

“본 초안 기준으로 일정 확정은 위험합니다. 확정본 제공 시점을 함께 합의 부탁드립니다.”

“초안 단계에서 외부 발송 시 재작업/신뢰 리스크가 큽니다. 내부 합의 후 공유하겠습니다.”

“이 문구/수치는 임시값입니다. 확정값은 내일 11시에 업데이트하겠습니다.”

“초안 공유는 가능하나, 외부 커뮤니케이션은 ‘가안’ 표기 포함 부탁드립니다.”

“초안 기준으로 결론을 내리면 나중에 수정이 ‘변경’으로 보입니다. 결정 항목만 먼저 확정합시다.”

“초안 사용 범위(회의용/내부용/대외용)를 지정 부탁드립니다.”

“초안에 대한 피드백은 오늘 17시까지로 끊고, 이후는 범위 변경으로 분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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