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법인카드의 책임성

결제는 한 번, 설명은 열 번

by NaeilRnC

후인은 법인카드를 처음 받았을 때 기분이 묘했다. 권한을 받은 것 같았고, 신뢰를 받은 것 같았다. 그것도 착각이었다. 법인카드는 권한이 아니라 레이더다. 돈을 쓰는 순간, 돈이 아니라 “책임의 좌표”가 찍힌다.


회식이 있던 날이었다. 부장은 말끝을 올렸다.

“오늘은 팀워크지. 법카로 해.”


후인은 결제를 했다. 계산대에서 영수증을 받는 순간부터 후인의 밤은 시작됐다. 회사는 영수증을 돈의 증거로 쓰지 않는다. 영수증을 “누가 결정했나”의 증거로 쓴다. 다음날 아침, 메일이 왔다.

“영수증 업로드 부탁드립니다. 참석자 명단, 사용 목적, 승인자 기재 바랍니다.”


후인은 웃음이 나왔다. 어제는 “팀워크”였는데, 오늘은 “증빙”이었다. 팀워크는 감정의 언어로 시작하고, 증빙은 문서의 언어로 끝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책임은 자연스럽게 카드 소지자에게 고정된다. 문제는 ‘법카는 쓰라고 준 카드’인데, ‘쓰면 설명해야 하는 카드’라는 점이다.


설명은 늘 뒤늦게 요구된다. 사전에 합의된 기준이 없으니까. 그날도 부장은 가볍게 말했다.


“회의비로 하면 되지.”

“간식비로 하면 되지.”

“그냥 복리후생으로…”


그냥. 후인은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똑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그냥”이 등장하면, 나중에 반려될 가능성이 높다. 반려가 되면, “왜 그렇게 했냐”가 온다. 그리고 왜의 대답은 늘 카드 소지자의 몫이 된다.


후인은 그날 이후 법인카드를 쓸 때, 결제보다 먼저 문장을 썼다. 돈을 쓰기 전에, 책임의 경계를 박는 문장.


후인이 만든 “법인카드 안전문장” 9개

“본 건 법인카드 사용 가능 범주(회의비/복리후생/업무추진비) 중 어디로 처리할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사용 목적/참석자/승인자 기준 확정 후 결제하겠습니다.”

“지출 증빙을 위해 참석자 명단과 사용 목적을 메일로 남기겠습니다.”

“한도/항목 기준이 없어 반려 리스크가 있습니다. 기준 공유 부탁드립니다.”

“승인자 회신 확인 후 결제 진행하겠습니다.”

“결제는 가능하나, 사후 반려 시 처리 주체(부서/개인) 확정이 필요합니다.”

“동일 항목 반복 지출 가능 여부를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정산 기준이 변경될 수 있어, 결제 전 승인 캡처/메일로 남기겠습니다.”

“반려 시 대체 처리(개인카드 전환/부서 비용) 방안까지 합의 부탁드립니다.”


법인카드는 돈을 쓰라고 준 카드가 아니다. 회사가 “누가 그 선택을 했는지” 기록하려고 준 카드다.

그래서 후인은 결제보다 먼저, 선택의 책임을 문장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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