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의 문장들25

인사평가는 기억의 정치 : 1년이 아니라 ‘최근’이 사람을 결정

by NaeilRnC

회사에는 계절이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니라 “평가 시즌”이다.

평가 시즌이 오면, 사람들은 갑자기 기록을 사랑한다. 평소에는 기억하지 않던 일들을 갑자기 기억한다.

특히, 불편했던 장면만. 후인은 1년 내내 버텼다.


야근을 했고, 컨펌을 받았고, ‘좋게 가자’를 삼켰고, 초안을 최종으로 만들었고, 법카를 긁었고, 반려를 맞았고, 다시 고쳤다. 그런데 평가 시즌이 되자, 1년은 사라지고 한 달이 남았다. 팀장이 말했다.

“후인씨 요즘은… 커뮤니케이션이 좀 딱딱해진 것 같아.”


요즘. 그 요즘은 최근 일주일의 톤이다. 최근 일주일은 후인이 한계에 닿았던 일주일이다.

회사는 한계를 구조로 보지 않는다. 회사는 한계를 태도로 본다. 팀장은 이어서 말했다.

“일은 잘하는데, 팀워크 관점에서 조금 더…”


팀워크. 후인은 그 단어가 나올 때마다 몸이 굳는다.

팀워크는 자주 측정 불가능한 항목이고, 측정 불가능한 항목은 권력으로 측정된다.

평가 시즌의 핵심은 ‘성과’가 아니다. 평가 시즌의 핵심은 ‘해석’이다.

해석은 누가 하느냐에 따라 바뀐다. 그래서 후인은 평가 시즌을 “인사”가 아니라 “기록 재배치”로 본다.


그리고 그 시즌에는, 평소보다 더 정확한 문장을 남긴다.

성과를 자랑하려고가 아니라, 해석이 과하게 왜곡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후인은 평가 면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올해 제가 맡은 범위와 성과, 그리고 리스크 대응을 지표로 정리해 공유드리겠습니다. ‘느낌’보다 ‘사실’로 맞추고 싶습니다.”


그 문장은 회사가 싫어하는 방식이다.

회사는 애매함을 좋아하고, 애매함을 사랑하는 조직은 사람을 애매하게 태운다.


후인이 만든 “평가 시즌 방어” 문장 9개


“올해 담당 범위/성과/리스크 대응을 지표로 정리해 공유드리겠습니다.”

“팀워크 항목은 행동 사례로 확인 가능하니, 구체 사례 기준으로 논의 부탁드립니다.”

“커뮤니케이션 피드백은 개선하고 싶습니다. 다만 ‘딱딱함’의 기준(메일/회의/단톡)을 사례로 알려주시면 반영하겠습니다.”

“업무량/야근/리스크 대응이 지속 가능하지 않은 지점이 있어, 내년에는 범위/승인/우선순위 합의를 제안드립니다.”

“제 기여는 팀 성과로 귀속되어도 좋습니다. 다만 기여가 누락되지 않도록 주요 산출물 리스트를 남기겠습니다.”

“평가 기준이 모호하면 오해가 생깁니다. 역량/성과/협업 지표를 항목별로 맞추고 싶습니다.”

“개선점은 동의합니다. 다만 개선을 위해 권한/정보/승인 경로도 함께 정리되어야 합니다.”

“올해의 어려움은 개인 문제가 아니라 프로세스 이슈였던 부분이 있어, 재발방지 관점으로 공유드리겠습니다.”

“다음 분기 목표는 범위가 확정돼야 측정 가능합니다. 목표를 측정 가능한 문장으로 합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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