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문장을 되찾는 사람
후인은 어느 순간 깨달았다. 회사의 언어는 전염되지만, 완치가 불가능한 병은 아니라는 걸.
다만 회복에는 조건이 있었다. 의식적으로 다른 문장을 고르는 일.
단답을 멈추고, 기준을 꺼내고, 합의를 요청하고, 책임의 경계를 문장으로 박아두는 일.
그건 대단한 반항이 아니었다. 회사를 뒤엎는 혁명도 아니었다.
그저 매번 조금씩, 자동 반응을 끊는 일이었다.
“가능합니다.”라고 치고 끝내지 않고, 한 줄을 더 붙이는 것.
“가능합니다. 다만 변경 범위를 확정해주시면 그 범위 안에서 품질을 보장하겠습니다.”
“확인했습니다.”로 면책을 끝내지 않고, 합의로 바꾸는 것.
“확인했습니다. A/B 중 어느 방향이 최종인지 확인 부탁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가 도장으로 끝나지 않게, 행동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내일은 제가 그 부분 맡겠습니다.”
후인은 그런 문장들이 생각보다 큰 싸움을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물론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말이 많다”는 표정으로 후인을 봤다. 어떤 사람은 단답으로 되돌려줬다.
그리고 여전히 “ㅇㅇ”은 존재했고, “그냥”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달라진 게 하나 있었다.
후인은 예전처럼, 그 단답을 자신에 대한 판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답은 상대의 습관일 뿐, 내 존재의 가치평가가 아니라는 걸 조금씩 분리할 수 있게 됐다.
회사는 사람을 한 덩어리로 만들고 싶어 한다. 업무 능력과 태도, 감정과 성격, 성실함과 희생을 한 덩어리로 묶어서 “너니까”로 처리하기 쉽게 만들려고 한다. 후인은 그 덩어리를 문장으로 쪼개기 시작했다.
일은 일로,
관계는 관계로,
책임은 책임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후인은 자기 안의 회사 언어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인턴이 물었을 때였다.
“선배님, 이 표 이렇게 하면 될까요?”
후인의 손가락이 자동으로 “ㅇㅇ”를 치려다가 멈췄다. 순간 후인은 알았다. 전염은 밖에서만 오지 않는다.
전염은 내가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로 이어진다.
그가 지웠던 건 단순히 두 글자가 아니라, 감정을 삭제하는 습관이었다. 후인은 대신 이렇게 썼다.
“지금 방향 맞습니다. 다만 이 항목은 기준을 한 줄만 더 붙이면 더 안전합니다. 제가 5분만 같이 보겠습니다.”
그때 후인은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회사의 언어를 배운 덕분에 살아남았고, 회사의 언어를 끊는 덕분에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는 안도감.
살아남는 기술과 살아 있는 감각은 다르다. 후인은 그 둘을 분리하는 법을 이제야 배우고 있었다.
물론 모든 날이 나아진 건 아니다. 어떤 날은 또다시 알림음에 몸이 먼저 굳는다.
어떤 날은 “내일 아침까지”라는 말에 심장이 빨라진다.
어떤 날은 결국 밤을 내주고, 다음날 아침에 또 설명해야 한다. 구조는 개인의 깨달음만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건 후인도 안다. 그렇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구조가 그대로여도, 언어를 바꾸면 내 소모의 속도는 달라진다.
그리고 그 속도가 달라지면, 언젠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버티는 것만이 아니라, 고르는 것.
더 오래, 더 덜 닳는 방식으로. 그날 밤도 알림이 울렸다.
띠링—
후인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가, 잠깐 내려놓았다. 바로 답하지 않았다. 바로 “네”를 치지 않았다.
그는 숨을 한 번 고르고, 화면의 문장을 읽었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회사가 싫어하는 방식으로 답을 썼다.
“가능합니다. 다만 범위와 최종 승인 기준을 먼저 확정해주시면, 그 기준에 맞춰 안전하게 진행하겠습니다.”
보내고 나서 후인은 폰을 뒤집어 놓았다.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은 자기 자신에게 “ㅇㅇ”만 남기지 않았다. 문장 하나로 경계를 세웠다.
그 작은 경계가, 후인의 하루를 전부 빼앗기지 않게 막아줬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그런 경계가 필요하길 바란다. 회사의 언어는 전염된다.
그러나 전염을 멈추게 하는 것도 결국 문장이다.
누군가는 의식적으로 더 길게 말해야 한다.
누군가는 기준을 물어야 한다.
누군가는 침묵 대신 기록을 남겨야 한다.
후인은 그 누군가가 되기로 했다. 싸움을 원해서가 아니라, 숨을 쉬기 위해서.
띠링—
알림은 내일도 울릴 것이다. 하지만 후인은 이제, 그 소리에 인생을 바로 내주지 않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