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쩌면 우리는 기억하기 위해 추억을 남길지도 모른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어제 먹은 점심 메뉴를 떠올리는 데도 시간이 걸렸고, 누군가의 얼굴은 선명한데 이름은 자꾸 비어 있었다.
반대로 어떤 순간들은 과하게 또렷했다. 버스 창문에 비친 내 얼굴, 눅눅한 장마철의 냄새, 누군가가 “괜찮아”라고 말하던 목소리의 온도.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것들이 내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가끔은 억울했다.
“그럼 추억이라도 만들어야지.”
그 말을 처음 들은 건 병원 복도에서였다. 의사는 친절했고, 설명은 간결했으며, 내 손에는 다음 예약 날짜가 적힌 종이가 들려 있었다. 나는 종이를 접었다 펼쳤다 하며 그 날짜가 내 삶에서 어떤 의미가 될지 가늠해보려 했다.
그때 옆에 있던 사람이 말했다. 친구도, 연인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한 번도 ‘그런 사이’였던 적이 없는 사람. 그런데도 이상하게, 내 삶의 특정 페이지마다 늘 등장하던 사람.
“기억이 사라진다면, 남기는 방식도 바뀌어야 하잖아.”
그녀의 이름은 도윤이었다. 우리는 대학 때 같은 동아리였고, 졸업 후에는 서로의 생일을 놓치기 시작했으며, 몇 년 후에는 우연히 같은 동네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또 몇 년 후, 병원 복도에서 재회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우리의 타이밍을 조율하는 것처럼, 우리는 꼭 ‘정리’ 해야 할 순간에만 나타났다.
그날 도윤은 말했다.
“하나씩 해보자. 기억이 사라질까 봐 무서워하는 대신, 기억이 남을 수밖에 없게.”
말장난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끌렸다. 무서움이 갑자기 ‘할 일’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첫 번째 추억은 아주 사소했다. 집 앞 작은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일이었다.
도윤은 일부러 새로운 맛을 골랐고, 나는 늘 먹던 맛을 골랐다. 도윤이 내 손을 툭 치며 말했다.
“너는 늘 안전한 맛을 고르네.”
“너는 늘 쓸데없이 모험하잖아.”
“이게 쓸데없지 않아. 나중에 네가 잊어도, 네 혀는 기억할 수도 있어.”
나는 웃었지만, 웃음 뒤에 묘한 울컥함이 따라왔다. ‘혀가 기억한다’는 말이 이상하게 진지했다.
우리는 슈퍼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바람은 차가웠고, 지나가던 학생들이 웃으며 떠들었다. 그 장면이 오래 남을 거라고 확신했다.
나에게 필요한 건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그때 나는 살아 있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장면들이었다.
도윤은 그날부터 작은 노트를 들고 다녔다. 표지는 낡은 초록색이었고, 페이지는 유난히 얇았다.
추억을 만들 때마다 그녀는 짧은 문장을 적었다.
‘첫 번째. 아이스크림은 차가운데, 손은 따뜻했다.’
“이건 뭐야? 일기야?”
“설명서.”
“뭘 설명해?”
“너를. 네가 너를 잊어버릴 때, 너를 다시 꺼내는 방법.”
설명서라는 단어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웠다. 내 삶에 설명서가 있었다면 덜 흔들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 더 솔직해졌다.
“나 사실… 가끔은 내가 나를 잊을까 봐 무서운 게 아니라… 남들이 나를 잊을까 봐 무서워.”
도윤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그래서 더더욱 추억이 필요하지.”
“왜?”
“추억은 기억이 아니라 증거니까.”
증거. 그 단어는 추억을 갑자기 단단하게 만들었다. 감정의 장식이 아니라, 존재의 흔적. 내가 여기 있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 증명하는 것.
두 번째 추억은 조금 더 무리했다. 우리는 새벽 기차를 타고 바다를 보러 갔다. 갑자기. 정말 갑자기. 도윤은 전날 밤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 새벽 5시. 역에서 보자.’
나는 “왜?”라고 물을 새도 없이 “좋아”라고 답했다. 내 안에서 이상한 충동이 움직이고 있었다. 사라질 것에게 끌려가지 않으려면, 내가 먼저 내 삶을 끌고 가야 한다는 충동. 역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커피 냄새만 진하게 떠돌았다. 도윤은 뜨거운 캔커피를 내게 건네며 말했다.
“너, 지금 이 냄새 기억해. 이게 오늘의 시작이야.”
“왜 이렇게 과장해?”
“과장해야 남는다.”
그날 바다는 회색이었다. 하늘도, 물도, 모래도 회색인데 이상하게 우울하지 않았다. 파도가 부서질 때마다 하얀 거품이 생겼고, 그 거품이 잠깐씩 ‘지금’을 밝히는 것 같았다. 나는 파도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기억을 잃으면…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내가 싫어했던 사람들도 결국 다 같은 방식으로 사라지는 거잖아.”
“맞아.”
“그럼 사랑은 뭐야? 결국 잊힐 텐데.”
도윤은 바다를 보며 대답했다.
“사랑은… 잊히는 걸 전제로 해도 남기려는 거.”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도윤을 보았다. 도윤은 웃고 있었다. 평소처럼 가볍게 웃었는데, 그 웃음이 내 마음을 찌를 정도로 깊었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도윤이 나에게 해주는 모든 ‘추억 만들기’가 사실은 도윤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걸. 그녀는 나를 위해 증거를 남기는 동시에, 자신이 놓치기 싫은 것들을 붙잡고 있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잠들었다. 꿈속에서도 바다의 회색이 이어졌다. 하지만 꿈은 꿈답게 흐릿했고, 깨어나자마자 나는 불안해졌다. 방금 꾼 꿈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그러다가 내가 잊어서는 안 되는 건 현실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도윤이 내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또 그 표정이다.”
“무슨 표정?”
“지금도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표정.”
“놓치고 있는 게 맞으니까.”
“그럼 더 만들어. 놓치기 전에.”
세 번째 추억은 조금 위험했다. 우리는 서로의 비밀을 교환하기로 했다. 추억이 자꾸 ‘예쁜 장면’만으로 구성되면 그것도 거짓말이 될 것 같았다. 기억은 요약본이 아니라 체온이니까. 체온에는 뜨거운 날도, 차가운 날도 있다. 나는 내 비밀을 먼저 말했다.
“나, 가끔은 일부러 사람들을 멀리해. 언젠가 내가 잊을까 봐… 차라리 처음부터 깊어지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해.”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기 비밀을 말했다.
“나도 비슷해. 나는…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는 게 두려워. 내가 그 기대를 못 지킬까 봐. 그래서 늘 ‘가벼운 사람’처럼 굴어.”
그 말은 도윤에게서 처음 듣는 진지함이었다. 그동안 그녀는 늘 내가 무너지기 전에 농담을 던졌다. 내가 병원을 두려워하면 바다로 도망가자고 했고, 눈물을 삼키려 하면 아이스크림 맛을 바꾸자고 했다. 그런데 그녀가 그런 방식으로 자신도 숨기고 있었다는 걸, 나는 그제야 알았다.
“그럼 우리 지금… 서로를 가볍게 만든 거네.”
“응. 그게 안전하다고 믿었지.”
나는 조용히 말했다.
“근데 안전하면, 남는 게 없잖아.”
도윤이 물었다.
“그래서 너는 남고 싶어?”
그 질문은 이상하게도 ‘살고 싶어?’와 같은 의미로 들렸다. 나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남고 싶어. 내 안에라도.”
그날 우리는 노트에 적었다. ‘세 번째. 우리는 안전을 선택하느라 서로를 덜 사랑했다.’
그 문장을 쓰는데 손이 아팠다. 추억은 달콤한 것만이 아니라, 아픈 것을 언어로 만드는 일이기도 했다.
어느 날 나는 도윤에게 물었다.
“너는 왜 이렇게까지 해?”
“뭘?”
“추억 만들기.”
도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나도 잊힐까 봐.”
“네가?”
“응.”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너만 그런 게 아니야. 사람은 다 잊힐까 봐 무서워해. 근데 너는 그 무서움을… 좀 더 빨리, 좀 더 선명하게 만나게 된 거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울컥했다. 내가 특별히 약해서, 특별히 불행해서 이런 일을 겪는 줄 알았다. 그런데 도윤은 이걸 ‘선명하게 만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내 불행을 다른 각도로 돌려놓는 말이었다. 그것이 도윤의 방식이었다. 삶을 조금이라도 더 견딜 만한 언어로 바꿔주는 방식.
그날 밤 나는 혼자 노트를 펼쳤다. 도윤이 적어놓은 문장들 사이에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내가 웃었던 순간, 내가 짜증 냈던 순간, 내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보던 순간. 누군가가 내 삶을 이렇게 촘촘히 적어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낯설고, 너무 고마웠다.
페이지 끝에 도윤의 글씨로 이런 문장이 있었다.
‘추억을 만드는 건, 기억을 위한 일이 아니라 살아 있기 위한 일이다.’
다음 진료날, 의사는 말했다.
“진행 속도는 느린 편입니다. 약물 반응도 나쁘지 않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장이 희망인지, 연기인지, 단순한 통계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병원 문을 나서자 도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어때?”
“음… 느리대.”
“좋네.”
“좋은 건가?”
“적어도 우리는 더 많이 만들 시간이 있다는 거잖아.”
도윤은 그렇게 말했다. 언제나처럼. 그리고 언제나처럼 그 말이 나를 조금 살게 했다. 그 뒤로도 우리는 추억을 만들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일부러 안 쓰고 뛰기도 했고, 어릴 때 좋아하던 만화책을 찾아 같이 읽기도 했고, 아무 이유 없이 서로의 손바닥에 점을 찍고 “이건 오늘의 증거”라고 웃기도 했다. 특별하지 않은 목록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특별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 저녁, 도윤이 물었다.
“너, 혹시 나중에 나를 잊어버리면… 어떡할래?”
나는 노트를 가슴 쪽으로 꼭 안았다.
“노트를 읽겠지. 그리고… 몸이 기억할 거야. 아이스크림 맛, 바다 냄새, 커피 향. 네가 내 옆에 있었던 시간의 질감.”
도윤은 웃었다. 그 웃음이, 내 안에서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나는 요즘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는 어쩌면 기억하기 위해 추억을 만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게 낭만이 아니라 생존이라면—오늘을 살아내는 이유도, 조금은 설명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