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맛

2. 아이스크림은 차가운데, 손은 따뜻했다.

by NaeilRnC

내 기억은 늘 ‘큰일’에서 빠지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사소한 데서 먼저 비었다.

오늘 아침에 뭘 먹었는지,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사람이 몇 층에 사는지, 내가 방금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그런 것들이 한 겹씩 들떠서 손가락으로 긁으면 벗겨지는 필름처럼 떨어져 나갔다.


그래서 도윤이 말한 “추억 만들기”가 싫지 않았다. 싫기보다는, 딱 그만큼만 믿고 싶었다.

내 인생을 구할 거라는 거창한 희망이 아니라, 적어도 오늘을 버티게 해 줄 거라는 수준의 믿음.

우리는 집 앞 작은 슈퍼로 갔다. 진열장 앞에서 도윤은 신중하게, 정말 신중하게 ‘새로운 맛’을 골랐다.

나는 늘 먹던 걸 집었다.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 선택이 나를 데리고 간 느낌이었다.

손이 먼저 가는 쪽이 늘 같았다. 안전한 쪽. 도윤이 내 손등을 툭 쳤다.


도윤 : 너는 늘 안전한 맛을 고르네.

후인 : 너는 늘 쓸데없이 모험하잖아.

도윤 : 쓸데없지 않아. 나중에 네가 잊어도, 네 혀는 기억할 수도 있어.


도윤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혀가 기억한다. 기억이 머리의 전유물인 줄 알았는데, 내 몸 어딘가가 대신 기억해 줄 수도 있다는 말. 이상하게 그게 위로였다. 손바닥이 뜨겁고, 아이스크림이 차가운 그 대비가 ‘지금’을 더 또렷하게 눌러 붙였다.


우리는 슈퍼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도윤은 한 입 먹고 잠깐 멈췄다. 마치 이 장면을 저장하는 타이밍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나는 괜히 눈앞의 풍경을 한 번 더 훑었다. 아이들이 지나가며 웃었다. 바람이 얇게 불었다. 내 손에 묻은 초코가 조금씩 녹아 손가락 끝을 끈적하게 만들었다.


도윤 : 너 지금, 또 저장하려고 하지?

후인 : 어떻게 알았어?.

도윤 : 표정이 그래.


도윤이 주머니에서 초록색 노트를 꺼냈다. 낡은 표지, 얇은 속지. 그녀의 손에서 노트가 가볍게 들렸다 내려앉는 걸 보는데, 이상하게 목이 말랐다. 나는 ‘얇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조금만 방심하면 찢어질 것 같은 것들. 그리고 찢어진 뒤에는 원래대로 붙일 수 없는 것들. 도윤은 펜으로 뭔가를 쓰고는 노트를 덮었다.


후인 : 뭐라고 썼어?

도윤 : 나중에 보여줄게.


나는 ‘나중에’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중에는 늘 한 발 늦게 도착했고, 늦게 도착한 것들은 대부분 이미 망가져 있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어머니’가 떠 있었다. 나는 잠깐 멈췄다. 도윤이 내 얼굴을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노트를 내 쪽으로 조금 밀어놓았다.

여기,라고. 말없이. 네 편, 이라고.


전화를 받자 어머니는 묻지도 않고 말했다.

어머니 : 병원 다녀왔어? 어디야.

후인 : 집 근처.

어머니 : 누구랑?


질문이 짧을수록, 이미 답이 정해져 있다는 걸 나는 안다. 나는 도윤을 봤다. 도윤은 아이스크림을 아주 천천히 먹고 있었다. 내 대답이 흔들리지 않게, 일부러 시간을 늘리는 사람처럼.


후인 : 그냥… 친구.


어머니는 잠깐 조용했다. 그 조용함이 ‘생각하는 시간’이 아니라 ‘결론을 정리하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어머니 : 그 애 또 만나니.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그 애’라는 호칭이 사람을 이름에서 떼어내는 방식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도윤이 도윤이 아니라 ‘그 애’가 되는 순간. 그 애는 늘 문제의 자리에 앉았다. 통화가 끊기고, 플라스틱 의자 아래로 바람이 지나갔다. 나는 손을 무릎 위에 얹었는데, 손끝이 어딘가에서 헛도는 느낌이 들었다. 도윤이 먼저 말했다.


도윤 : 괜찮아. 오늘은 끝까지 먹자. 남기면 내일 더 헷갈려.


나는 아이스크림 막대를 꼭 쥐었다. 막대가 손바닥에 박힐 만큼 세게. 단맛이 입안에 남았는데, 이상하게도 목구멍은 쓰렸다. 내가 지금 붙잡고 있는 게 아이스크림인지, 오늘인지, 아니면 도윤인지—순간 구분이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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