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2. 익숙한 캔커피 냄새

by NaeilRnC

도윤은 전날 밤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 새벽 5시. 역에서 보자.’


나는 “왜?”를 쓰지도 못하고 “좋아”를 보냈다. 내 안에서 어떤 충동이 올라왔다. 기억이 빠져나가는 속도에 끌려가기 싫었다. 차라리 내가 먼저 하루를 끌고 가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그렇게라도 기억을 붙잡고 싶었다.


역은 비어 있었다.

역은 원래 사람들이 지나가는 곳인데, 그날은 지나갈 사람까지 비켜 준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편의점 불빛만 과하게 밝았고, 바닥은 밤을 그대로 받아 검게 반짝였다. 도윤이 뜨거운 캔커피를 내 손에 쥐여줬다. 금속이 손바닥에 붙는 느낌이 있었다. 따뜻함보다 먼저 ‘뜨거움’이 와서, 나는 본능적으로 손가락을 한 번 움찔했다.


도윤 : 너, 이 냄새 기억해.

후인 : 왜 이렇게 과장해?

도윤 : 과장해야 남아


나는 웃는 척했다. 웃음이 입술 끝에만 걸렸다. 도윤은 캔을 한 번 더 돌려 내 손에 꼭 맞게 쥐여줬다.

마치 내가 놓치지 못하게 위치를 잡아주는 사람처럼.


기차 창밖은 검었다. 검은색도 온도가 있다는 걸 그날 알았다. 차가운 검정이 아니라, 오래 눌러 둔 이불속처럼 어딘가 눅진한 검정. 그 안에서 불빛들이 지나갈 때마다 잠깐씩 ‘오늘이 시작됐다’는 신호처럼 스쳤다.


바다에 도착했을 때는 회색이었다. 하늘도, 물도, 모래도. 그런데 우울하지 않았다. 파도가 부서질 때마다 하얀 거품이 생겼고, 그 거품이 잠깐씩 ‘지금’을 밝히는 것 같았다. 회색이 계속 회색만은 아니었다. 회색 안에도 층이 있었다.


우리는 한참 걸었다. 도윤은 먼저 앞서가다가, 내가 따라오는 걸 확인하면 속도를 늦췄다. 나는 그게 고마우면서도 조금 슬펐다. 누군가가 내 걸음을 ‘확인’ 해야 한다는 사실이. 나는 파도를 보다가 말했다. 말을 꺼내기 전까지 몇 번이나 캔커피를 코앞에 가져갔다. 냄새를 들이마시면, 지금이 뿌리처럼 박힐 것 같아서.


후인 : 나 가끔 생각해. 내가 기억을 잃으면… 사랑했던 사람도, 싫어했던 사람도, 다 똑같이 사라지는 거잖아.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속도가 느렸다. 급하게 위로하지 않는 사람의 속도였다.


도윤 : 맞아.

후인 : 그럼 사랑은 뭐야. 결국 잊힐 텐데.

도윤 : 잊히는 걸 전제로 해도 남기려는 거.


도윤은 바다를 보며 말했다. 파도가 부서지는 타이밍에 맞춰, 아주 낮게. 그 말이 이상하게 내 가슴을 찔렀다. 도윤은 늘 가벼운 농담으로 나를 붙잡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어떤 순간에는 너무 정확해서 더 아팠다. 나는 캔커피를 한 번 더 쥐었다. 손바닥이 따뜻해지면서, 그 따뜻함이 도망칠 길을 막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걷고, 멈추고, 또 걸었다. 그리고 말이 더 이상 필요 없을 때까지 바다를 봤다. ‘지금’을 밝히는 건 거품이 아니라, 우리가 거기에 서 있다는 사실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기차에 올랐을 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이었다. ‘어머니’. 음성 메시지도 하나.

도윤이 내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도윤 : 또 그 표정이다.

후인 : 무슨 표정.

도윤 : 지금도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표정.


나는 메시지를 재생했다. 어머니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낮아서 더 단단했다. 단단해서, 부딪치면 내가 먼저 깨질 것 같은 목소리.


어머니 : 후인아. 오늘 저녁, 집에 와. 네가 어디서 뭘 하는지… 이제는 알아야겠다.


"알아야겠다"라는 말이, 물음이 아니라 결론처럼 들렸다. 캔커피를 더 세게 쥐었다. 뜨거움이 금속에서 손바닥으로, 손바닥에서 팔 안쪽으로 번졌다. 나는 그 뜨거움으로 내 몸을 붙잡았다. 지금, 여기, 내가 있다는 걸 확인하려고.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옆에 앉아 창밖을 함께 봤다. 그녀의 침묵이 이상하게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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