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추억은 기억이 아니라 증거다.
다음 진료날, 의사는 말했다.
의사 : 진행 속도는 느린 편입니다. 약물 반응도 나쁘지 않고요.
느리다는 말이 희망인지 유예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희망은 보통 따뜻한데, 유예는 차갑다. 그런데 병원에서 듣는 “느리다”는 이상하게도 둘 다 닮아 있었다. 진료실 문을 나서자 도윤이 복도 끝에 서 있었다. 꼭 ‘정리해야 할 순간’에만 나타나는 사람처럼. 나는 그녀가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느꼈다가, 동시에 그녀가 지금도 너무 ‘정확하게’ 나타난다는 게 조금 불길해졌다.
도윤 : 어때?
후인 : 느리대.
도윤 : 좋네.
후인 : 좋은 건가?
도윤 : 우리가 더 많이 만들 시간이 있다는 거잖아.
도윤은 늘 불안을 ‘관리 가능한 일’로 바꿔준다. 나는 그게 고맙고, 동시에 의심스럽다.
어떻게 사람은 늘 이런 문장을 준비해 둘 수 있을까.
내가 무너질 타이밍을 예측하는 것처럼, 나를 붙잡는 문장을 미리 꺼내는 것처럼.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도윤은 초록 노트를 꺼내 내게 처음으로 제대로 펼쳐 보였다. 나는 지금까지 그 노트를 ‘존재하는 물건’으로만 알고 있었다. 도윤의 가방에서 가끔 나타났다 사라지는, 표지가 낡고 얇은 물건. 그런데 펼쳐진 순간, 그건 물건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처럼 보였다.
후인 : 이건 뭐야. 일기야?
도윤 : 설명서.
후인 : 뭘 설명해?
도윤 : 너를. 네가 너를 잊어버릴 때, 너를 다시 꺼내는 방법.
페이지는 유난히 얇았다. 얇아서 더 무서웠다. 조금만 힘을 주면 찢어질 것 같았고, 찢어지면 나도 같이 찢어질 것 같았다. 글씨는 촘촘했다. 촘촘해서 숨이 막힐 정도였다. 내가 웃었던 날, 짜증 냈던 날,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보던 날. 누군가가 내 삶을 이렇게 촘촘히 적어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낯설고 고마웠다. 마치 내가 내 삶을 놓칠까 봐, 다른 사람이 먼저 붙잡아 둔 것처럼. 몇 장을 넘기다가, 내 손이 멈췄다.
내 글씨였다. 분명히 내 글씨인데, 나는 저 문장을 쓴 기억이 없었다.
‘도윤을 믿고 싶어도, 어떤 날은 도윤이 낯설다.’
‘어머니는 “안전”을 말하지만, 안전이 나를 더 작게 만든다.’
나는 손가락으로 문장을 한 번 더 짚었다. 잉크가 번져 있지는 않았다. 방금 쓴 것도 아니었다. 오래된 문장처럼 단단하게 말라 있었다. 그런데 그 오래됨이 더 무서웠다. 나는 그 문장을 “처음” 읽고 있는데, 문장은 이미 여기 있었다. 나는 노트를 덮고 도윤을 봤다.
후인 : 이거… 내가 쓴 거야?
도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난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도윤은 잠깐 숨을 고르더니, 아주 조용히 말했다.
도윤 : 너는 기억이 비어도, 문장은 남길 수 있어.
그 말이 위로가 아니라 경고처럼 들렸다. 내가 나를 ‘낯설다’고 적어둔 문장을, 오늘의 내가 처음 읽고 있다는 사실. 내 안에 어제의 내가 숨어서 오늘의 나를 관찰하는 기분. 나는 내가 나를 안내할 수 있다고 믿어 왔는데, 지금은 내가 나를 따라가는 느낌이었다. 따라가다 보면, 어느 문장 끝에서 내가 사라져 있을 것 같은 느낌.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또 ‘어머니’가 떴다. 도윤이 내 얼굴을 한 번 보고, 짧게 말했다.
도윤 : 받아. 대신 오늘은 설명하지 마.
설명하지 마. 그 말이 이상하게 정확했다. 어머니에게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누구와 있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설명하는 순간, 나는 스스로 내 삶을 재판정에 올려놓게 된다. 그리고 어머니는 늘 판결을 알고 있다. 나는 판결문에 도장을 찍는 역할만 하게 된다. 나는 숨을 들이쉬고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는 단정하게 말했다.
어머니 : 후인아. 오늘 저녁, 집에 와.
나는 묻지 못했다. 질문하는 순간, 나는 그 답을 감당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답이 도윤을 내 삶에서 떼어내는 방식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후인 : 알겠어.
나는 그렇게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끊는 순간, 내 손바닥이 차가워졌다. 아까 병원 복도에서 “느리다”를 들었을 때는 애매한 따뜻함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사라졌다. 대신 ‘오늘 저녁’이라는 시간이 내 앞에 놓였다. 시간은 원래 흐르는 건데, 어떤 시간은 덩어리처럼 굳어 앞을 막는다. 도윤이 말없이 노트를 다시 내 쪽으로 밀었다. 마치 말없이 말하는 것처럼.
여기. 네가 너를 꺼내는 방법. 나는 노트를 다시 펼치지 못했다. 펼치면 또 내가 모르는 내 문장이 나올 것 같아서. 그런데 동시에, 펼치지 않으면 내가 진짜로 사라질 것 같았다. 나는 얇은 페이지 위에 손을 얹었다. 얇은 종이 하나가, 오늘의 나를 붙잡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그리고 그 이상함이 지금은, 나를 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