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질문의 무게
저녁이 가까워질수록 몸이 먼저 반응한다. 어머니 집으로 가는 길은 늘 똑같은데, 오늘은 신호등이 하나씩 더 생긴 것 같다. 한 번 멈출 때마다 내가 나를 더 오래 붙잡는다. 붙잡는다는 건, 어쩌면 미루는 일이다.
발걸음이 느려지면 도윤이 옆에서 속도를 맞춘다. 말이 없을 때도 있다. 도윤은 말보다 ‘옆’으로 버티는 사람이라 침묵이 어색하지 않다. 다만 오늘의 침묵은 달랐다. 무언가가 이미 결정돼 있고, 우리는 그 결정의 날짜로 걸어 들어가는 침묵이었다. 현관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먼저 말을 꺼냈다.
후인 : 너는 안 들어와도 돼.
도윤이 고개를 갸웃한다.
도윤 : 왜?
후인 : 그냥… 어머니가 싫어하잖아.
도윤은 잠깐 생각하더니, 아주 조용히 말한다.
도윤 : 싫어하는 게 나인지, 네가 흔들리는 게 싫은 건지 아직 모르지.
그 말이 날카롭지 않게 박혔다. 도윤은 늘 이렇게 말한다. 싸우지 않으면서도, 내가 피해 가는 질문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다. 도윤은 내 옆에 그대로 섰다.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자 어머니는 내 얼굴부터 확인하듯 훑었다. 그리고 도윤을 보는 순간, 눈빛이 아주 얇아졌다. 얇아져서 더 날카로워졌다.
어머니 : 들어와.
나는 반사적으로 말을 잇는다.
후인 : 도윤이도…
어머니가 내 이름을 다시 부른다.
어머니 : 후인아.
두 번째 부름은 ‘대화는 여기까지’라는 뜻이다. 도윤이 내 팔꿈치를 가볍게 쳤다. 괜찮다는 신호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더 조심하라는 신호 같기도 했다. 도윤은 문밖에 남는다. 어머니는 문을 반쯤 닫는다. 도윤의 존재를 시야에서 지우려는 것처럼, 애초에 없었던 사람처럼.
거실은 깨끗했다. 어머니는 깔끔함으로 사람을 통제한다. 먼지 하나 없는 바닥과 딱 맞춘 쿠션이 “여기서는 네가 어긋나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어머니가 묻는다.
어머니 : 병원에서 뭐래?
후인 : 느리대.
내 입에서 나온 그 문장은 도윤이 자주 쓰는 문장이라, 입에 쉽게 붙는다. 어머니는 그 ‘붙음’을 눈치챈 듯 잠깐 멈춘다. 그리고 한숨을 쉰다. 안도인지 불만인지 알 수 없는 숨. 숨이 짧을수록 결론은 더 단정해진다.
곧바로 다음 질문이 떨어진다.
어머니 : 그 애랑은… 계속 볼 거니?
나는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가 멈춘다. 도윤의 말이 떠올랐다.
'받아. 대신 오늘은 설명하지 마.'
그런데 어머니 앞에서 설명하지 않는 건 곧 거짓말처럼 보인다. 어머니는 “설명”을 사랑의 형식으로 믿고, 동시에 설명을 통제의 도구로 쓴다.
후인 : 도윤이는 그냥… 친구잖아.
어머니가 웃는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이 빠지는 소리다.
어머니 : 너는 항상 그렇게 말하더라. 친구. 그냥. 별거 아니라고.
후인 : 뭐가.
어머니 : 네가 중요한 걸 숨길 때 쓰는 말.
나는 왜인지 모를 갈증이 났지만 어머니는 물을 주지 않았다. 대신 서랍에서 종이 하나를 꺼낸다. 흰 종이. 글자들이 정갈하게 찍혀 있다. 서류의 냄새는 언제나 비슷하다. 향이 아니라 결정을 담은 종이 냄새.
어머니 : 이거 읽어 봐.
어머니가 내 앞에 종이를 놓는다.
어머니 : 너 앞으로 정상적인 치료를 계속 받으려면, 보호자 지정이 필요할 수도 있어. 너도 알지?
보호자. 그 단어가 낯설지 않다. 최근의 어딘가에서 들었다. 병원 복도, 서류, 그리고—도윤의 노트. 그런데 내 기억은 그 지점에서 자꾸 흔들린다. 흔들리는 건 대개 내가 ‘싫어하는 진실’이 있는 곳이다.
후인 : 보호자는… 어머니로 하면 되잖아요.
내가 말하자 어머니는 잠깐, 아주 잠깐 표정이 풀릴 뻔했다가 다시 단단해진다. 풀리는 건 감정이고, 단단해지는 건 결심이다.
어머니 : 그래. 내가 할 수 있지. 근데 문제는…
어머니가 말을 끊고, 종이를 손가락으로 탁 친다.
어머니 : 네 주변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면 일이 복잡해져.
복잡해져. 그 말은 ‘안 된다’의 다른 표현이다. 어머니는 늘 금지 대신 절차를 말한다. 절차는 틀린 사람이 아니라, 틀린 상황을 만든다. 나는 종이를 내려다본다. 글자들이 내 눈앞에서 흔들린다. 어머니는 일부러 속도를 늦춰 말한다. 마치 천천히 말하면 내가 덜 아플 거라고 믿는 사람처럼.
어머니 : 후인아. 너는 지금 '안전'을 생각해야 해.
그 말에, 나는 이상하게 화가 난다. 아이스크림 냉동고 앞에서 도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는 늘 안전한 맛을 고르네.'
그때는 웃었는데, 지금은 웃지 못한다. 안전한 맛은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 내가 선택당한 맛이었다.
후인 : 엄마는 왜 그렇게 도윤이를 싫어해?
내 목소리가 조금 높아진다. 어머니는 높아진 목소리를 ‘불안정’의 징후로 보는 사람이라, 오히려 더 낮게 말한다. 낮게 말할수록 더 권위가 생긴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어머니 : 싫어하는 게 아니야. 그 애는… 떠나야 해.
싫다와 떠나다가 동시에 묶인다. 내쫓는 말인데 보호하는 말처럼 들리는 방식. 나는 순간 머리가 하얘진다.
질문이 올라온다. 그 질문은 이미 혀 끝까지 와 있다. '왜 도윤이가 떠나야 하지?'
하지만 나는 그 질문을 삼킨다. 질문을 하는 순간, 나는 그 답을 감당해야 하니까. 그리고 그 답이 도윤을 내 삶에서 떼어내는 방식일까 봐. 현관 쪽에서 작은 소리가 난다. 문밖의 도윤이 아주 조용히 문을 한 번 두드린 것 같다. 어머니는 못 들은 척한다. 나도 못 들은 척해야 할 것 같다. 어머니의 집에서는, 들은 것까지 책임이 되니까. 어머니가 다시 말한다.
어머니 : 후인아. 네가 나를 믿어야 네가 널 아파
나는 안다. 어머니가 말하는 ‘덜 아픔’은 내가 덜 느끼는 상태가 아니라, 어머니가 덜 불안해지는 상태라는 걸. 어머니의 평온이 내 불안보다 먼저다. 내 손은 무릎 위에서 주먹을 쥐고 있다.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생길 정도로. 나는 그 자국이 오늘의 증거가 되길 바란다. 내가 오늘 여기서 무너지지 않았다는 아주 작은 증거.
그리고 나는, 끝내 묻지 못한 질문을 마음속에서만 되뇐다. 도윤은 왜 날 떠나야 하는 거지. 질문은 무겁다.
무거운 질문은 보통, 다음으로 넘어간다. 내가 들고 갈 수 있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