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떠날 수 있는데도 남은 선택
문을 열고 나왔을 때 도윤은 여전히 문 앞에 서 있었다. 어깨를 벽에 기댄 채, 휴대폰 화면도 보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의 자세였다. 집안은 아직 깨끗하고 단단한 공기로 가득했는데, 문밖은 밤공기가 조금 느슨했다. 나는 그 느슨함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풀어지는 순간, 내가 무너질 것 같았다.
도윤 : 괜찮아?
도윤이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머니 집의 공기는 늘 이상했다. 먼지 하나 없는데도 무거웠다. 정리된 공기라서 더 숨이 막혔다. 도윤은 내 얼굴을 한 번 훑더니, 말투를 낮췄다. 낮추는 방식으로 나를 안정시키는 사람처럼.
도윤 : 어머님이 서류 보여줬어?
후인 : 응.
도윤 : 읽었어?
후인 : 제목도 못 읽었어.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게 예상 범위라는 것처럼.
“괜찮아, 네가 틀린 게 아니야”라는 말 대신, 도윤은 내 손을 봤다. 무릎 위에서 주먹을 쥐던 손.
손바닥에 남은 자국을 보며 도윤이 말했다.
도윤 : 너는 무서우면 손을 그렇게 쥐더라.
후인 : 내가?
도윤 : 응. 예전부터.
예전이라는 말이 걸렸다. 도윤은 ‘예전’을 자연스럽게 말한다. 나는 예전이 자꾸 빠져나가는데.
그 차이가 우리 사이를 얇아서 더 날카로운 선처럼 얇게 갈랐다.
도윤 : 어머님은 뭐라셔?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어머니의 문장을 그대로 옮겼다. 옮기는 순간, 그 말이 다시 내 목으로 올라왔다. 종이 냄새와 함께.
후인 : 너는 떠나야 한다고 하셨어. 너는 나를 떠날 수 있어야 한대.
도윤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정말 미세해서, 내가 아니었으면 못 봤을 정도로. 도윤은 웃으려 했고, 그 웃음이 완성되기 전에 잠깐 멈췄다. 그 멈춤이 오히려 더 많은 말을 했다. 그리고 도윤은 결국 웃음을 꿰매 붙였다.
도윤 : 어머니다운 말이다.
후인 : 무슨 뜻이야?
도윤 : 사람을 내보내는 말을, 사람을 위하는 말처럼 하는 거.
나는 그 말에 더 화가 났다. 내가 화가 난 건 어머니 때문인지, 도윤이 너무 익숙하다는 듯 말해서인지, 아니면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누군가의 결정에 끌려 다니고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정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구분이 안 될 때 인간은 더 불안해진다. 불안해질 때 나는 더 단단한 걸 찾는다. 오늘의 단단함은 도윤이었다.
후인 : 도윤아. 너는 왜 계속 나랑… 이러고 있어?
도윤이 잠깐 멈췄다. 나는 도윤이 “친구니까” 같은 말을 꺼낼까 봐 싫었다. 그 말은 안전한 맛이다. 안전한 맛은 늘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다. 도윤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도윤 : 너도 알잖아. 너 지금 혼자 있으면—
후인 : 그건 상황이지 이유가 아니야! 이유, 너의 이유는 뭐냐고?
도윤은 나를 봤다. 내 눈을 똑바로 보았다. 그리고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피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도윤은 이미 많은 걸 말하고 있었다. 도윤은 한 번 숨을 들이쉬고, 무언가를 결심한 듯 아주 짧게 내쉬었다.
도윤 : 떠날 수 있는데도 남는 건, 선택이니까.
선택.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오히려 더 무서워졌다. 선택이라면, 언젠가 선택이 바뀔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도윤은 내 불안을 읽었는지 주머니에서 초록 노트를 꺼냈다. 낡은 표지, 얇은 속지. 너무 얇아서 찢어질 것 같은데, 그 안에는 내가 버티는 방식이 적혀 있다. 도윤은 오늘 날짜 옆에 짧은 문장을 적었다. 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작게 났다. 그 소리가 ‘결정’처럼 들렸다.
후인 : 뭐라고 썼어?
내가 물었다. 도윤이 노트를 바로 덮지 않고, 내 쪽으로 살짝 돌려 보여줬다. 내가 볼 수 있는 각도로만.
‘오늘. 어머니는 떠나라고 했다. 도윤은 남겠다고 했다.’
나는 그 문장을 읽고, 목구멍이 잠겼다. 이건 “추억”이 아니라 확실히 “증거”였다. 그리고 그 증거는 처음으로, 내 선택을 요구하는 증거였다.
후인 : 오늘의 증거?
내가 말하자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 : 응. 그리고… 오늘의 기준.
후인 : 기준?
도윤 : 네가 내일 또 흔들릴 때, 오늘의 너를 다시 꺼내는 기준.
도윤은 노트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평소처럼 가볍게, 하지만 가볍지 않게.
도윤 : 오늘은 집에 가자. 더 이상… 싸우지 말고.
우리는 계단을 내려갔다. 한 계단 내려갈 때마다, 집 안에서 들었던 단정한 문장들이 조금씩 멀어졌다. 하지만 멀어진다고 사라지지는 않았다. 사라지는 건 대개 내가 아니라, 내가 가진 권리였다. 집으로 가는 길, 나는 문득 생각했다. 어머니는 도윤이 떠나길 바란다. 도윤은 떠날 수 있는데도 남겠다고 한다.
그럼 나는? 나는 지금,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리고 처음으로, 질문이 질문에서 멈추지 않았다. 나는 주머니 속 손바닥을 펴서, 손톱자국을 한 번 문질렀다. 오늘의 증거를 확인하듯.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도윤을 붙잡는 일이 아니라 내 삶에서 누가 결정을 내리는지를 바꾸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나는 무섭고도 이상하게 또렷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