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

7. 설명하지 않는 날에도, 마음은 설명을 원한다.

by NaeilRnC

아침에 도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토스트를 구웠다. 버터가 녹는 냄새가 부엌을 채웠다.
도윤이 내 집에 있는 아침은 드물었다. 그래서 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서웠다.

나는 밤에 꾼 꿈을 말할지 망설였다.

꿈속의 ‘배우자’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무언가가 돌이킬 수 없이 바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미 내 안에서는 바뀌고 있었다. 바뀌는 걸 모르는 척하는 게 더 피곤했다.

후인 : 도윤아. 나 어제 꿈에… 이상한 단어를 봤어

도윤은 토스트를 뒤집는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

도윤 : 어떤 단어.
후인 : 배우자.


내가 말하자, 도윤의 손이 잠깐 멈췄다. 정말 잠깐. 토스트가 타지 않을 정도의 순간.
그런데 나는 그 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나는 내가 민감한 건지, 도윤이 흔들린 건지, 구분하지 못했다.

기억이 흔들릴 때 사람의 얼굴도 흔들리는 법이라. 도윤은 다시 손을 움직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도윤 : 왜 하필 그 단어였을까?


도윤은 늘 그랬다. 급한 진실은 접어두고, 내가 무너지지 않는 쪽을 먼저 고르는 사람.
도윤은 토스트를 접시에 올려 내 앞에 놓고, 물을 따랐다.

그런 일들을 하면서 말했다. 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도윤 : 요즘 병원 서류 얘기 많이 들었잖아. 머리가 복잡해서 만들어진 거겠지.


그 설명은 그럴듯했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그럴듯한 설명은, 진짜를 숨길 때도 쓰이니까.
나는 도윤을 똑바로 봤다.


후인 : 혹시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도윤은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마치 단어 하나를 고르는 사람처럼.

도윤 : 숨기는 게 아니라…순서를 지키는 거야.

후인 : 무슨 순서.

도윤 :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순서.


그 말이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 감당.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됐나.

기억이 비어서? 그럼 나는 얼마나 쉽게 ‘감당 불가’가 되는 거지.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후인 : 나한테도 규칙이 있어.
도윤 : 뭔데.


도윤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


후인 : 설명하지 않는 날이라도…


나는 말을 멈췄다가, 더 정확하게 고쳤다.

후인 : 설명하지 말아야 하는 날에도, 마음은 설명을 원해

도윤이 웃었다. 이번엔 얇지 않은 웃음이었다.

웃음이 얇지 않다는 건, 도윤이 ‘괜찮다’고 결론을 내렸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결론이 무서우면서도 안도했다.
결론이 난 사람의 표정은 편하지만, 결론이 난다는 건 이미 선택지를 접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도윤은 주머니에서 초록 노트를 꺼냈다. 그리고 오늘 날짜 옆에 짧은 문장을 적었다.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이상하게 안정적이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 “아, 아직 연결돼 있구나”라고 느낀다.

후인 : 또 메모하는 거야?

도윤 : 응. 이건 네가 내일 나를 의심해도… 오늘 너는 이렇게 말했었다는 증거야.


그 말이 이상하게 아팠다. 내가 내일 도윤을 의심할 미래가, 이미 전제로 깔려 있는 말 같아서.

나는 토스트를 베어 물었다. 입안에서 바삭하게 부서지는 감각이 선명할수록, 마음은 더 흐릿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또 어머니였다. 나는 자동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도윤이 내 손목을 잡았다.

잡은 손이 세지 않았다. 세지 않아서 더 단단했다. 힘으로 막는 게 아니라, 방향을 바꿔주는 손.

도윤 : 오늘은 설명하지 않는 날이야. 대답은 짧게. 그리고…


나는 도윤의 문장을 이어받았다. 이미 외운 규칙처럼.

후인 : 감정은 나중에.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의가 오늘의 가장 확실한 위로였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 : 후인아. 오늘은 병원에 같이 갈거야


어머니 목소리는 늘 그랬듯 단정했다.

단정하다는 건 흔들림이 없다는 뜻이고, 흔들림이 없다는 건 이미 결정을 끝냈다는 뜻이다.

후인 : 누가?


내가 물었다. 짧게, 규칙대로. 어머니는 잠깐 멈췄다가 아주 분명하게 말했다.

어미니 : 나. 그리고…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


내 입안이 갑자기 말라붙었다. 어울리는 사람.
그 표현은 사람을 사람으로 부르는 말이 아니라, 자리에 맞는 부품을 고르는 말처럼 들렸다.

그리고 꿈속의 단어가, 그 말에 붙어버렸다.
어머니는 관계를 고르는 게 아니라, 내 인생의 빈자리에 맞는 부속을 끼우려는 말투였다.

배우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도윤이 내 옆에 앉아 있는데, 어머니는 도윤을 말로도 존재하게 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세계에서 도윤은 늘 ‘그 애’로만 살아야 한다.

아니, ‘그 애’로도 부르지 않는 날들이 있다는 걸 나는 오늘 깨달았다.

어머니는 이제 도윤을 지울 수 있는 방식을 찾고 있었다.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규칙대로. 통화가 끊기자 도윤이 내 손목에서 손을 뗐다.

손을 놓는 순간이 더 무서웠다. 손을 놓는 순간부터, 내가 혼자 결정해야 하는 영역이 시작되는 것 같아서.

그때부터는 누가 옆에 서 있는지가 아니라, 누가 내 이름으로 서명하는지가 문제였다.
도윤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도윤 : 후인아. 오늘은 네가 선택해야 하는 날이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선택. 그 단어가 바닥에 떨어진 유리처럼 날카로웠다.
나는 그 유리를 맨손으로 집어야 할 것 같았다. 피가 나더라도, 오늘은 누가 대신 집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규칙이 있다는 건, 결국 규칙을 어길 날이 온다는 뜻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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