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적지 않은 이름이 오히려 더 오래 남는다.
펜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병원은 늘 조용한데, 그 조용함은 사람을 더 크게 만든다.
내가 선택하는 소리가 내 머리 안에서만 울리지 않고, 바깥으로 새어 나가는 느낌.
나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이름을 쓰기 직전에 멈췄다.
빈칸은 작았다. 그런데 그 칸이 이상하게 넓었다. 한 칸인데, 내 삶의 문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무엇을 쓰든, 그 문은 한 번 열리면 다시 같은 각도로 닫히지 않을 것 같았다.
간호사가 말했다. “어… 아직 기입이 안 되셔서요.”
어머니는 내 손을 내려다봤다. 내 손이 아니라, 내 손의 떨림을.
어머니 : 후인아. 왜 그래?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주 낮아졌다. 낮을수록 단단해지는 목소리.
‘왜’라는 질문은 어머니에게서 드문 형태였다. 어머니의 질문은 늘 답이 정해진 질문이었으니까.
나는 그 드문 ‘왜’를 듣는 순간,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지금 여기서 내가 말하는 문장 하나가, 내가 아니라 누군가의 판결문에 붙을 것 같아서.
후인 : 나 지금… 누가 옆에 서면 좋은지 모르겠어.
내가 말했다. 어머니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너무 빠르게 답을 꺼냈다.
그리고 아주 빠르게 이어붙였다. 마치 설명이 아니라 절차를 말하는 사람처럼.
어머니 : 그러니까 내가 하겠다는 거잖아. 너도 알지? 너는 감정으로 결정하면 나중에 더 힘들어.
감정.
어머니는 감정을 늘 ‘위험’으로 분류한다. 반면 도윤은 감정을 ‘증거’로 분류한다.
나는 그 둘 사이에서 자주 길을 잃는다. 길을 잃을 때마다 나는 안전한 쪽으로 미끄러진다.
안전한 쪽은 늘 어머니 쪽이었다. 안전한 쪽은 늘 ‘내가 덜 흔들리는 쪽’이었다.
도윤이 내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도윤 : 후인아. 지금은 ‘좋아하는 사람’ 적는 칸이 아니야. 그냥… 네가 편한 사람 적는 칸이야.
편한 사람. 그 말이 가벼워 보여서 더 무거웠다.
편하다는 건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건 누군가가 이미 나를 잡아두었다는 뜻일 때가 많다.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서류를 어머니 쪽으로 밀었다.
후인 : 어머니가 하세요.
어머니의 표정이 아주 잠깐 풀렸다. 승리의 표정이 아니라 안도의 표정.
그 안도가 더 불쾌했다. 내 인생이 누군가의 안도감으로 정리되는 느낌이어서.
어머니는 펜을 잡고 이름을 적었다.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 글씨로.
글씨는 너무 정갈해서, 마치 ‘사람’이 아니라 ‘결정’이 적히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마지막에 사인을 하며 말했다.
어머니 : 잘 생각했어.
그 말이 칭찬이 아니라 결재 승인처럼 들렸다. 나는 그 순간 확실히 알았다.
보호자라는 단어는 도움의 단어가 아니라, 권한의 단어가 될 수 있다는 걸.
접수는 끝났고, 우리는 대기실로 이동했다. 나는 도윤을 봤다. 도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이 없을 때 도윤이 더 많은 말을 한다는 걸 나는 안다. 도윤은 지금 화난 게 아니라, 상처받은 거였다.
그런데도 나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게 더 아팠다.
몰아붙이지 않는 방식으로 나를 존중하는데, 그 존중이 오늘은 내 선택을 더 비겁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후인 : 미안해.
내가 겨우 말했다. 도윤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리고 한 박자 뒤, 아주 작게 덧붙였다.
도윤 : 미안할 필요 없어. 다만… 오늘 네가 선택한 게 ‘안전’이라면, 그 안전이 너를 살리는지 확인해야 해.
그 문장은 화가 아니라 확인이었다. 도윤은 늘 그 방식으로 나를 놓친다.
잡아당기지 않고, 내가 내 몸을 다시 붙잡게 만든다. 그런데 오늘 나는 그 확인이 두려웠다.
확인은 곧 다음 선택을 요구하니까. 어머니가 바로 끼어들었다.
어미니 : 그 애 말 듣지 마. 너는 지금 회복이 먼저야.
회복.
어머니가 말하는 회복은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 도윤이 말하는 회복은 ‘다시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
나는 그 둘 중 무엇을 원하는지 아직 모르겠다.
다만 오늘 나는, 원래대로 돌아가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다시 선택할 수 있게 되면 살아있을 것 같았다.
안심과 살아 있음이 다르다는 걸 나는 요즘 너무 자주 느낀다.
진료실 문이 열리고, 내 이름이 불렸다. 나는 일어나면서 무의식적으로 손을 주먹 쥐려다 멈췄다.
손바닥을 폈다. 오늘은 주먹을 쥐지 않기로 했으니까.
주먹을 쥐는 순간, 나는 또 ‘붙잡히는 사람’이 될 것 같아서.
도윤이 그걸 봤다. 도윤의 눈이 잠깐 젖었다. 그 젖음은 눈물이 아니라, 참는 방식이었다.
그 표정은 말보다 더 정확했다. 지금 네가 뭘 하고 있는지, 나는 안다. 라는 표정.
진료실로 들어가기 직전, 도윤이 내 주머니에 무언가를 넣어줬다. 종이였다. 아주 작은 종이.
안으로 들어와서 몰래 펼쳐보니, 도윤의 글씨였다.
‘오늘은 네가 안전을 골랐어도, 내일은 네가 너를 고를 수 있어.’
나는 그 문장을 다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이상하게도, 그 종이가 ‘이름’보다 오래 남을 것 같았다.
이름은 서류에 적혀서 사라질 수도 있지만, 저 문장은 내 손바닥에 붙을 것 같았다.
내가 잊어도, 내 몸 어딘가가 기억하는 방식으로. 적지 않은 이름이, 오히려 더 오래 남는다.
빈칸이 남긴 건 공백이 아니라, 다음을 고를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