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의 단어

10. 한 단어가 어긋하면, 인생 전체가 어긋난다.

by NaeilRnC

진료실 문이 닫히자 공기가 달라졌다. 바깥 대기실의 소음이 접히고, 내 숨소리만 펴졌다.

병원 냄새는 늘 비슷한데, 문이 닫히는 순간부터는 그 냄새가 “여긴 네 이야기지만, 네가 결정권자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의사는 컴퓨터 화면을 보다가 나를 보다가 다시 화면을 봤다. 눈동자가 자꾸 왕복할 때마다, 나는 내가 ‘확인해야 하는 대상’이 된 기분이었다. 사람은 확인을 반복할수록, 이미 뭔가를 놓친 상태라는 뜻이니까.


의사 : 컨디션은 어떠세요?

후인 : 그냥… 비슷해요.


나는 최대한 짧게 말했다. 설명하지 않는 날은 어제였는데도, 설명은 여전히 입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설명은 늘 한 박자 늦게 도착하고, 늦게 도착한 설명은 대부분 누군가에게 빼앗긴다.


의사는 몇 가지를 확인했다. 약은 잘 먹는지, 잠은 어떤지, 최근 감정이 급하게 올라오는 순간이 늘었는지.

나는 답을 하면서도 내 답이 내 것이 아닌 기분이 들었다. 내가 나를 대신해서 말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라는 사람은 여기서 목소리가 아니라 데이터처럼 취급되고 있었다.


의사는 타이핑을 하다가 잠깐 멈췄다.
그리고 너무 자연스럽게—그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서늘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말했다.


의사 : 오늘은 어머님이 보호자로 오셨고… 지난번 내원 기록을 보면… 도윤씨가 동행인으로 기재돼 있어요

내 머리가 멈췄다. 기록.

나는 요즘 기억보다 기록을 더 믿으려 했는데, 기록도 가끔은 나를 배신하는 것 같았다.

아니, 배신이라기보다 기록은 늘 ‘누군가의 손’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나는 잊고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문 쪽을 봤다.

문밖에 도윤이 앉아 있을 텐데, 의사는 마치 도윤이 이 방 안에 있는 사람처럼 이름을 불렀다.
방 안에 없는 사람이, 기록 한 줄로 방 안으로 들어와 버리는 느낌.


후인 : 도윤이요?


내가 되물었다. 의사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 : 네. 동행인/응급연락처 쪽에요. 보호자란은 오늘 어머님으로 들어와 있고요.


동행인. 응급연락처. 보호자.
단어들이 같은 화면 안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는 숨을 한 번 삼켰다. 내 삶도 요즘 저랬다.

같은 사람인데, 어떤 칸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관계’가 아니라 ‘권한’이 되는 것.


후인 : 저… 도윤이는 그냥…그냥 친구인데요.


나는 말을 고르다 실패했다. 의사는 “아” 하고 짧게 반응했다. 그 한 음절이 더 불안했다.

의사가 아무것도 몰라서가 아니라, 이미 화면으로 뭔가를 ‘정리’해두었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 같아서.

그 “아”는 이해가 아니라 분류였다. '친구로 분류 완료.


그때 문이 열렸다.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내 얼굴부터 살피고, 의사에게 몸을 반쯤 돌렸다. 늘 그렇게 했다.

내 상태는 내 입이 아니라 어머니의 문장으로 먼저 전달됐다. 내 말은 참고자료고, 어머니의 말은 결론이었다.


어머니 : 선생님, 서류 정리 다시 좀 부탁드릴게요. 요즘 얘가… 착각을 잘 해서요.


착각.
어머니가 내 상태를 설명할 때 가장 자주 쓰는 단어. 내가 틀렸다는 걸 먼저 확정해버리는 단어.

그리고 그 단어는 편리했다. ‘착각’이라고 부르는 순간부터, 내 말은 사실이 아니라 증상이 된다.

의사는 조심스럽게 화면을 몇 번 클릭했다.

의사 : 아, 네. 동행인 기재는 수정 요청하시면 가능하긴 합니다. 다만 환자분 동의가 필요하고요.


그 순간 어머니가 너무 빠르게 말했다.

어머니 :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보호자니까요.


그 문장이 진료실 안에서 너무 쉽게 굴러갔다. 마치 그게 당연한 질서라는 듯이. 나는 그 ‘당연함’이 무서웠다. 보호자라는 단어가 ‘도움’이 아니라 ‘권한’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보호자라는 칸이, 내 옆자리 같지 않았다.

내 위에 있는 자리 같았다. 나는 입을 열었다.


후인 : 선생님. 저… 기억이 헷갈리는 건 맞는데요. 기록이 헷갈리는 것도 가능한가요?


의사는 잠깐 나를 봤다. 그 잠깐이 길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의사 : 아니오. 기록은 틀리지 않습니다. 다만… 오해가 들어갈 여지는 있죠.


오해.

단어 하나가 내 머리 위에 부딪혔다. 어느 쪽이든 결론은 비슷했다.

나는 틀릴 수 있고, 그래서 누군가는 나를 대신해 적을 수 있다.

그 ‘대신’이 내 삶의 가장 위험한 단어 같았다. 대신 적어주면 편해진다. 대신 결정해주면 안전해진다.

그런데 그 편함과 안전이, 나를 점점 ‘내 삶 밖’으로 밀어낸다.


진료는 끝났다. 의사는 약을 바꾸지 않았고, 추적 관찰을 이어가자고 했다.

“진행은 급하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데 그 문장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늘 내게 급한 건 병이 아니라, 도윤이라는 이름이 의료기록 안에서 어떤 위치에 적혀 있는지였다.
이름 하나가 칸 하나를 차지하면, 칸 하나가 내일의 권한을 차지한다.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어머니가 내 팔을 붙잡았다.


어머니 : 너는 지금 네 컨디션부터 챙겨.
후인 : 어머니, 근데

어머니 : 근데는 없어. 너는 지금 틀릴 수 있어. 그래서 내가 옆에 있는 거고.


어머니는 아주 단정하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이 너무 무서워서 반박을 못 했다.

반박하면 내가 ‘불안정한 환자’가 되고, 반박하지 않으면 내가 ‘관리되는 사람’이 된다.

어느 쪽이든, 나는 내가 아니었다. 내가 나일 수 있는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대신 누군가의 ‘옳음’이 커졌다.


문득 주머니 속 종이가 떠올랐다. 도윤이 넣어준 작은 종이.
오늘은 네가 안전을 골랐어도, 내일은 네가 너를 고를 수 있어.

나는 손바닥을 펼쳤다. 오늘은 주먹을 쥐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런데도 손끝이 떨렸다.
내일이라는 단어가, 오늘만큼은 너무 멀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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