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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지워진 기록은, 지워지지 않는다.

by NaeilRnC

병원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찼다. 계절이 바뀌는 냄새가 났다. 이상하게, 그 냄새는 싫지 않았다.

냄새는 아직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기억은 빠져도 냄새는 남는다. 도윤이 말하던 문장이 떠올랐다.

“몸이 기억한다”고.


로비 한쪽에 도윤이 앉아 있었다. 내가 나오자 바로 일어섰다. 나는 그게 고마우면서도 불편했다.

누군가가 내 ‘나오는 시간’을 외우고 있다는 사실이, 위로이면서 동시에 증거 같아서.

그런데 어머니가 먼저 도윤에게 걸어갔다.


그 장면이 이상했다.

어머니는 도윤을 싫어하면서도, 도윤에게 할 말이 생기면 늘 가장 정확한 위치로 걸어간다.

사람을 밀어내는 일에도 동선이 있는 사람처럼. 망설이지 않는 걸음.

망설임이 없다는 건, 이미 결론이 있다는 뜻이다.


어머니 : 도윤 씨.


어머니가 처음으로 도윤의 이름을 불렀다. 한 번의 호칭이 너무 낯설어서 오히려 섬뜩했다.

이름을 부르는 건 인정인데, 어머니의 인정은 대개 문을 여는 방식이 아니라 문을 닫는 방식으로 온다.

도윤도 순간 굳었다. 하지만 곧 표정을 정리했다.

마치 어머니가 좋아하는 ‘단정함’을 역으로 빌려 쓰는 사람처럼.


도윤 : 네.

어머니 : 기록 정리할 겁니다. 병원 쪽에도… 더 이상 당신 이름이 엮이지 않게 할 거예요.

도윤 : 왜죠?


도윤의 ‘왜’는 공격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그래서 더 날카로웠다. 어머니는 확인을 싫어한다.

확인은 통제를 늦추니까. 어머니가 숨을 고르고 말했다.


어머니 : 당신은 떠날 수 있어야 하니까.


그 문장을 듣는 순간, 내 몸이 먼저 반응했다. 어머니는 같은 말을 반복한다. 떠날 수 있어야 한다.

마치 도윤을 위해 하는 말처럼 말하지만, 나는 안다.

어머니가 말하는 ‘도윤의 자유’는 내 세계에서 도윤을 제거하는 방식이라는 걸.

도윤이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였다. 그리고 말했다.


도윤 : 후인 씨는요?


나를 ‘후인이’가 아니라 ‘후인 씨’라고 부른 건, 어머니 앞에서 내 이름을 사람으로 지키려는 방식처럼 들렸다.

말의 끝을 둥글게 만들면서도, 핵심은 더 정확히 꽂는 방식.


도윤 : 후인 씨는 떠날 수 있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도윤이 존댓말을 썼다. 아주 잠깐. 도윤이 존댓말을 쓰는 건 감정을 숨겨야 할 때다.

혹은 내가 ‘환자’로 취급되지 않게, 말의 모서리를 다듬을 때다.

다듬어진 말은 안전한데, 오늘의 나는 그 안전이 아팠다.

감정이 사라진 게 아니라, 감정이 더 깊이 들어간 소리였으니까.


어머니는 도윤을 보지 않았다. 시선을 주는 순간 도윤이 사람이 되니까.

어머니는 사람을 상대하고 싶지 않은 날에는, 사람을 절차로 만든다. 어머니는 내 쪽을 보고 말했다.


어머니 : 후인아, 가자.


나는 도윤을 봤다. 도윤은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눈빛이 이상했다.

붙잡는 눈이 아니라, 보내는 눈 같았다. 보내기 싫어서 더 단단해진 눈.

차로 가는 짧은 동선에서, 도윤이 내 손에 무언가를 쥐여줬다. 작은 플라스틱 카드였다.

얇고 매끈한 면에 작은 로고와 번호가 있었고, 뒷면에는 도윤의 글씨가 짧게 적혀 있었다.

잃어버리면, 나한테 와.


후인 : 이게 뭐야?


내가 묻자 도윤이 아주 짧게 웃었다.


도윤 : 네가 자주 잃어버리는 것 중 하나.

후인 : 내가 이런 걸 갖고 있었어?

도윤 : 응. 그리고 네가 잃어버리면, 보통 내가 찾았어.


도윤의 말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숨이 막혔다.

내가 잃어버리고, 도윤이 찾았다. 그 반복이 단순한 습관이 아니라 어떤 관계의 형태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형태의 이름을 아직 모른다. 아니, 모르는 척하고 있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어머니가 지울 수 있는 ‘기록’이 하나 더 생길 것 같아서.

차 문이 닫히기 직전, 도윤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도윤 : 후인아. 오늘은 네가 어머니를 골랐지.

후인 : 응.


나는 대답을 늦게 했다.


도윤 : 근데 오늘 선택이 네 전부는 아니야.


도윤은 잠깐 멈추고, 아주 천천히 덧붙였다.


도윤 : 너는… 네가 뭘 잃어버렸는지도 아직 몰라.


차가 출발했다. 어머니는 앞만 봤다. 운전하는 어머니의 옆얼굴은 늘 단정했다. 단정해서 더 무서웠다.

단정함은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감정을 ‘결정’으로 굳힌 상태니까. 어머니가 말했다.


어머니 : 도윤이랑 너무 얽히지 마.


그리고 덧붙였다.


어미니 : 기록은 지우면 돼. 관계도… 정리하면 돼.


정리. 어머니는 ‘정리’를 말할 때마다 누군가의 이름을 지운다. 오늘 지우려는 이름은 도윤이었다.

나는 손에 쥔 카드를 내려다봤다. 카드는 얇았다. 그런데 오늘은 그 얇은 플라스틱이 유난히 무거웠다.

얇은 것들이 가끔 내 삶을 가장 크게 바꾼다. 노트의 얇은 종이처럼, 서류의 얇은 한 장처럼.


그때 문득 깨달았다. 지워진 기록은 지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지워진 자리가, 내 눈에는 더 또렷하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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