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서랍

12. 정리된 방에는 숨긴 것이 더 많다.

by NaeilRnC

어머니와 함께 본가로 도착하자 어머니는 외투도 벗지 않고 서랍장을 열었다.

거실 한쪽, 오래된 서랍장. 어릴 때부터 그 서랍은 어머니의 영역이었다.

열리는 순간이 거의 없었고, 열리더라도 어머니는 항상 몸으로 가렸다.

어머니에게 서랍은 수납이 아니라 통제였다. 넣어두는 게 아니라, 손이 닿지 않게 하는 것.


어머니 : 오늘은 그냥 여기서 쉬어. 아무 생각하지 말고.

어머니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게 가장 안전한 대답이라는 걸, 나는 너무 일찍 배웠다.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는데도 거실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종이 소리는 늘 내 심장을 불안하게 만든다. 종이에는 결정이 적혀 있으니까.

종이는 사람을 바꾸고, 사람은 종이를 핑계로 더 단정해진다.


샤워를 하는 동안에도 어머니가 뭘 정리하는지 계속 상상하게 됐다.

병원 기록을 “수정”하겠다고 했으니 관련 서류를 모으는 걸까.

보호자 칸이 찍힌 종이들을 날짜별로 다시 끼워 넣는 걸까.

상상을 멈추려고 할수록 도윤의 얼굴이 더 선명해졌다.

내 손에 쥐여준 얇은 카드. 그리고 “네가 잃어버리면, 보통 내가 찾았어”라는 말.


내가 지금까지 도윤에게 얼마나 많은 걸 찾아달라고 했던 걸까. 기억을. 이름을. 내 삶에서 내 자리 같은 걸.

샤워를 끝내고 나왔을 때, 거실은 너무 조용했다. 어머니는 없었고, 서랍장은 닫혀 있었다.

닫힌 서랍은 열려 있는 것보다 더 신경 쓰인다. 안이 보이지 않는데도, 꽉 차 있다는 느낌이 드니까.

종이가 아니라 시간이 들어 있는 것처럼.


나는 부엌에서 물을 마시다가, 서랍장 쪽으로 한 걸음 갔다. 그리고 멈췄다. 하면 안 되는 일.

그런데 이미 발이 움직였다는 건, 마음이 먼저 결심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 뒤에서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 뭐해?


너무 갑자기라서 나는 손을 놓을 타이밍을 놓쳤다.


후인 : 그냥… 물 마시다가.

내가 얼버무렸다. 어머니는 내 손을 봤다. 손잡이를 쥔 손. 어머니는 그 사실을 기록하듯 차분하게 말했다.


어머니 : 거긴 네가 볼 필요 없어.

후인 : 왜?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날카로웠다. 나도 놀랐다.

날카로움은 곧바로 내 쪽의 ‘불안정’으로 번역될 텐데도,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가 숨을 고르고 말했다.


어머니 : 지금 네가 보면 더 헷갈려.


헷갈려. 그 말이 싫었다. 그 말은 내 의견을 무효화한다.

내가 느끼는 불편함도, 떠오르는 의심도 전부 ‘증상’으로 처리한다. 나는 숨을 들이쉬고 더 똑바로 말했다.


후인 : 헷갈려도 봐야겠어.


어머니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정말 잠깐. 그 흔들림이 오히려 내 확신을 키웠다.

어머니는 분명히 숨기고 있다. 무엇을. 누구를.


어머니 : 후인아. 너 지금 나랑 싸우고 싶어?


어머니가 낮게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손잡이를 더 꽉 잡았다. 그 행동이 대답이었다.

어머니는 내 앞으로 와서 내 손목을 잡아 떼어냈다.

억지로 밀어내는 힘이 아니라, 네가 틀린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의 힘. 그리고 서랍장을 열었다.

나에게 보여주려고 연 게 아니라, 나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연 것처럼.


서랍 안에는 파일과 봉투가 정리돼 있었다. 색깔별로, 날짜별로. 정돈된 종이들의 질서.

그 질서가 내 속을 메스껍게 했다. 어머니는 항상 이렇게 만든다. 집도, 말도, 사람도. 어긋나지 않게.

그러니까 도망치지 못하게. 나는 봉투 하나에서 도장 자국을 봤다. 빨간색. 딱딱한 글자. 가족.


그 뒤 글자는 어머니 손이 가렸다. 가려진 부분이 내 뇌를 더 자극했다. 나는 급하게 봉투 쪽으로 손을 뻗었다.


후인 : 가족? 그거 뭐야?

어머니 : 그냥 서류야. 병원 서류

후인 : 병원 서류에 왜 가족이라는 말이 있어?


내 목소리가 올라갔다. 올라간 목소리는 곧 ‘불안정’의 증거가 된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어머니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아주 단정하게 말했다.


어머니 : 너는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야.


그 한 문장으로 나는 다시 ‘관리 대상’이 됐다. 따지면 안 되고, 질문하면 안 되고, 그냥 보호받아야 하는 사람. 어머니가 원하는 후인.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더 직설적으로 물었다.


후인 : 도윤이랑 관련된 거야?


내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거의 확신이었다.

어머니는 잠깐 나를 보더니, 오히려 차분해졌다. 너무 차분해서 더 무서웠다.


어머니 : 맞아. 그래서 정리하는 거야.

후인 : 왜 정리해?

어머니 : 너를 위해서.

후인 : 그게 왜 나를 위해서야?

어머니 : 너는 잃어버리잖아. 기억을. 감정을. 판단을.


어머니는 한 박자 쉬고, 단정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내 얼굴을 똑바로 보며 덧붙였다.


어머니 : 근데 그 애는 그 틈을 이용할 수 있어.


이용.

도윤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

그런데 어머니가 도윤을 ‘그 애’라고 부르는 순간, 도윤은 사람이 아니라 가능성이 된다.

위험 가능성. 문제 가능성. 정리 대상.


후인 : 도윤이는 그런 사람 아니야.

내가 말했다. 어머니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어머니 : 너는 지금 도윤이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 수 있어?


확실히.
그 단어가 내 머리를 때렸다. 나는 요즘 확실한 게 없다. 그리고 그게 어머니의 무기다.

내가 확실하지 않으면 어머니가 대신 확실해진다. 대신 결정한다. 대신 정리한다.

나는 더 말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서랍을 닫고, 열쇠를 꺼내 잠갔다. 딸깍.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 나는 그 소리가 싫었다. 내 삶의 일부가 잠기는 소리 같아서.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 삶이 봉투 안에 들어가고, 나는 그 봉투 바깥에 서 있는 기분.


어머니 : 오늘은 여기까지. 네가 피곤할수록, 더 쉽게 흔들려. 그러면 도윤이 같은 애한테 더 휘둘려.”


어머니가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주머니 속 카드를 손으로 더듬었다. 플라스틱 모서리가 손끝에 걸렸다. 얇고, 차갑고, 단단한 감각. 카드가 내 손 안에서 작은 증거처럼 눌렸다.


오늘의 나는 어머니에게 졌다. 그런데 이상하게, 봉투의 도장 자국 하나가 계속 남았다.

가족. 그 단어는 지워지지 않았다. 지워진 기록보다 더 선명하게.

월, 목,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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