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의 파일

14. 기록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by NaeilRnC

도윤이 내려놓은 파일은 얇았다. 얇은데도 무겁게 보였다.

종이 한 장이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나는 오늘 하루 동안 충분히 배웠다.

그래서 손이 가지 않았다. 손끝이 파일 표지 위에서 맴돌기만 했다.

닿는 순간 읽게 될 것 같았고, 읽는 순간에는 다시는 예전으로 못 돌아갈 것 같았다.


후인 : 이거… 뭐야.


내가 묻자, 도윤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도윤은 늘 말을 ‘잘’ 하는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말이 조심스러웠다.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더 확실해 보였다. 정말 중요한 걸 말하려는 사람의 조심.


도윤 : 네가 잃어버린 것들이 정리돼 있어.

후인 : 어머니도 뭔가를 정리하시던데. 같은 거야?

도윤 : …

후인 : 서랍에 다 넣어두고. 날짜별로, 색깔별로. 사람도 그렇게 정리하고.


도윤의 눈이 잠깐 젖었다. 젖었다가, 바로 마른 사람처럼 다시 단정해졌다.


도윤 : 맞아. 그래서… 어머니가 정리하기 전에 네가 봐야 해.

후인 : 왜 지금? 너는 늘 순서 얘기했잖아.


도윤은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도윤 : 오늘 네가 ‘보호자 칸’에 어머니 이름을 적었지. 그 순간부터는… 내가 기다릴 수가 없었어. 이제는 네 기록이 어머니 손으로 더 쉽게 넘어가.


도윤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낮아질수록, 그 말은 단정이 아니라 경고가 됐다.


후인 : 기록이 넘어가면 뭐가 달라져? 어머니가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닌데.


나는 무심한 듯 말했다. 그런 나에게 도윤은 아주 조용히, 단어의 모서리를 세우듯 말했다.


도윤 : 그게 문제야. 어머니는 네 인생을 대신 살진 않지만 그 대신 네 인생의 설명을 갖고 있으려고 해.


설명. 나는 그 단어가 싫었다. 내 삶이 내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말로 정리할 수 있는 사례가 되는 느낌.

내가 사라지면 남는 건 사람이 아니라 해석이라는 느낌. 나는 파일을 다시 바라봤다.

표지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다. 도윤은 내 취향을 아는 것처럼,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글자 없는 표지는 더 무서웠다. 숨기기에 가장 좋은 표지니까.


후인 : 내가 열어도 돼?

도윤 : 응, 근데 규칙이 있어.


내가 묻자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인 : 또 규칙?


도윤은 억지로 웃었다. 늘어놓는 장난이 아니라, 버티기 위한 표정이었다.


도윤 : 오늘 네가 무너지면, 내가 책임질게. 대신… 너는 도망치지 마.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손바닥을 펼쳤다. 오늘은 주먹을 쥐지 않기로 했으니까. 파일을 열었다.

첫 장은 병원 서류였다. 진료 기록이 아니라 동의서 같은 것. 작은 글씨들이 촘촘히 이어져 있었다.

나는 설명을 읽을 힘이 없었다. 찾고 싶은 건 딱 몇 가지뿐이었다.

이름, 날짜, 관계. 내 머리가 힘들어하는 건 병의 진행이 아니라 관계의 위치였다.

도윤과 내가 어떤 관계로 ‘기록’돼 있는지.


두 번째 장에서 손이 멈췄다. 서류 한쪽에 ‘가족관계’라는 단어가 있었다.

붉은 도장. 낮에 서랍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색. 같은 질감. 종이가 가진 딱딱한 공기.


후인 : 이거…


내 목소리가 떨렸다.


도윤 : 그래. 네가 낮에 본 거랑 같은 종류야.


도윤이 말했다. 나는 글자를 읽으려 했는데 시야가 흔들렸다. 가까이 보면 더 멀어지는 글자들.

내용은 흐릿한데, 결론만 선명해지는 글자들. 도윤이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줄을 따라가며 천천히 짚어줬다. 억지로 읽게 하는 게 아니라, 읽을 수 있게 만드는 방식. 도윤은 늘 그렇게 한다. 나를 대신하지 않고, 나를 붙잡는다. 줄 끝에 이름이 있었다.

도윤. 그리고 그 위에 내 이름. 숨이 막혔다. 목 안쪽에서 소리가 나려다 멈췄다.


후인 : 이게… 뭐야. 왜… 내 이름 옆에 네 이름이 있어.


나는 겨우 말했다. 도윤은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도윤 : 후인아.

후인 : 응.

도윤 : 우리는… 가족이었어.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기보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는 순간 내 과거가 통째로 뒤집힐 테니까.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후인 : 아니야.

도윤 : 후인이—

후인 : 아니라고. 내가 결혼을 했었다고? 그런데 어떻게 내가 모를 수가 있어?


내 목소리가 커졌다. 커진 목소리는 내 것 같지 않았다. 누군가가 대신 소리 내주는 것 같았다.

도윤은 내 앞에 다시 앉았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도윤이 진정하려고 하는 자세였다. 도윤이 진정할 때는 보통 내가 무너지기 직전이다.


도윤 : 넌 잃어버렸어.


도윤이 말했다. 나는 파일 속 종이를 움켜쥐었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내가 지금 구기는 건 종이가 아니라 내 확신 같았다.


후인 : 언제? 우리가 언제 결혼을 했었어?


도윤은 대답 대신 파일 안쪽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오래된 인화 사진. 빛이 살짝 바랜 사진.

그런데 표정은 또렷했다. 너무 또렷해서 오히려 불쾌했다. 사진 속에서 나는 웃고 있었다.

도윤도 웃고 있었다.


나는 사진을 뚫어지게 봤다. 웃고 있는 내 얼굴이 낯설었다. 웃고 있는데 내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동시에, 너무 익숙했다. 버스 창문에 비친 얼굴처럼. 내 얼굴인데, 내 감정이 아닌 얼굴.


후인 : 어… 어떻게 이런 일이! 합성 아니야?”


나는 거의 비명처럼 말했다. 도윤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덧붙였다.


도윤 : 넌 네가 진짜로 웃을 때의 표정을 모르지? 사진을 봐. 저게 진짜 너의 표정이야


나는 사진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머리가 아팠다. 아픈데도 이상하게 살아 있는 느낌이었다. 아픔이 내 현실을 증명했다.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증거.


후인 : 그런데, 어머니는 왜… 왜 나한테 너를 그냥 친구로 믿게 했어?


목소리가 갈라졌다. 도윤은 시선을 내렸다. 한 번 내렸다가, 다시 올리지 못한 채 말했다.


도윤 : 어머니는… 네가 잊은 걸 기회라고 생각했어. 네가 기억 못 하면, 너는 선택할 수 없고, 그러면 어머니가 선택할 수 있으니까.


도윤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흔들리는 걸 숨기려는 흔들림이었다.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기억을 잃는 건 병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누군가가 그 병을 이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병이 아니라 권력. 내 머리의 빈칸이, 누군가 손이 들어갈 자리였다는 느낌.


후인 : 그래서 너를 떠나게 하려던 거야?


내가 물었다.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 : 응. 나에게 다른 사람을 찾으라고, 떠날 수 있게 해 준다는 하셨어. 하지만 내가 떠나면 너는 더 쉽게 정리될 거야.


도윤은 한숨을 쉬었다. 그 말이 나를 완전히 흔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나를 잃어버릴까 봐 무서웠다.

그런데 더 무서운 건, 내가 잃어버린 사이 누군가가 내 인생을 정리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정리된 형태’로 남겨버리는 것.


나는 다시 파일을 봤다.

서류, 사진, 도장, 이름.

증거들이 결론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나는 결론을 잡을 손이 없었다. 그래서 도윤의 말이 더 정확하게 들렸다. 결론이 아니라 증거부터. 그때 도윤이 말했다.


도윤 : 후인아. 너는 아직 결혼한 걸 ‘알아야’ 하는 단계가 아니야.


내 눈이 커졌다. 도윤은 바로 이어 말했다.


도윤 : 너는 지금… 왜 어머니가 그걸 숨겼는지를 알아야 해.


그 말이 정확했다. 내 머리는 결론보다 이유를 원했다.

결혼이라는 결론은 너무 크고, 이유는 지금 내가 붙잡을 수 있는 크기였다.


후인 : 그럼… 어머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내가 말했다. 도윤은 잠깐 침묵했다.

그 침묵이 결론을 만들기 전에, 증거를 한 번 더 확인하는 침묵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말했다.


도윤 : 네가 나를 잊는 것. 그리고… 네가 어머니만 남기는 것.


도윤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말이 끝나자 거실이 너무 조용해졌다.

파일 속 종이들이 숨을 죽인 것 같았다. 내 심장 소리만 커졌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에 뜬 이름은 어머니였다.

나는 받지 못했다. 받는 순간 오늘 밤의 모든 증거가 내일 아침 ‘착각’으로 정리될 것 같아서.

진동이 멈추자마자, 이번엔 메시지 알림이 떴다.


어머니 : 어디니.


짧은 문장. 단정한 문장. 도망갈 틈을 지우는 문장. 도윤이 내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아주 짧게.

잡아주는 게 아니라, ‘여기 있다’고 표시하는 정도로. 그리고 속삭였다.


도윤 : 이제부터는… 오늘의 증거를 네가 직접 만들자.


나는 파일을 닫지 않았다. 처음으로, 숨기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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