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앞의 숨

15. 들켜도 되는 건, 증거뿐

by NaeilRnC

어머니에게서 온 메시지는 짧았다.


어머니: 어디니.


짧은 문장. 단정한 문장. 도망갈 틈을 지우는 문장. 나는 화면을 오래 보고도 답을 못 했다.

답하는 순간, 오늘 밤의 모든 증거가 내일 아침 ‘착각’으로 정리될 것 같아서.


도윤 : 괜찮아?

후인 : 모르겠어. 내가… 뭘 모르는지도 모르겠어.


나는 목소리가 갈라지는 걸 느꼈다.

도윤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마치 내 숨까지 대신 정리해주는 사람처럼.

도윤 : 그게 정상이야. 갑자기 다 알게 되면 사람은 무너져.


그때 복도에서 엘리베이터 도착 알림음이 들렸다. 아주 작게. 그런데 그 작은 소리가 이상하게 또렷했다.
나는 순간, 내 집이 아니라 병원 대기실에 다시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조용한 공간은 늘 소리를 키운다.

그리고 소리가 커지는 순간, 결정도 커진다. 도윤이 내 눈을 봤다.


후인 : 혹시…


내 휴대폰이 다시 진동했다. 이번엔 전화였다. 어머니. 나는 받지 않았다.

받는 순간, 오늘 밤의 증거가 내일 아침 ‘증상’으로 바뀔 것 같아서.

진동이 멈추자마자, 도어락에서 삑 소리가 났다. 내 숨이 멎었다. 도윤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파일을 덮었다. 덮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몸이 먼저 움직였다.
도윤은 파일을 소파 밑으로 밀었다. 숨기는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 자연스러움이 내 속을 뒤집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숨기며 살아본 적이 있다는 뜻 같아서.


문이 열리고, 어머니가 들어왔다. 어머니는 먼저 내 얼굴을 봤고, 그다음 도윤을 봤다.

도윤이 여기 있다는 사실이 어머니 표정에 얇은 단단함을 한 겹 더 얹었다.

어머니는 외투도 벗지 않은 채 말했다.

어머니 : 도윤 씨가 왜 여기 있어요?


이름을 또렷하게 부르는 목소리였다. 인정이 아니라, 선을 긋는 발음.

이름을 부르는 것은 때로 통제의 시작이기도 하다. 도윤이 먼저 말했다.


도윤 : 후인이가 불렀어요.


어머니의 시선이 내게 박혔다.

어머니 : 너는 왜 불렀니.


목소리는 차분한데 문장은 칼이었다. 어머니 앞에서 ‘설명’은 늘 함정이다.

설명하는 순간, 내 문장은 어머니의 해석 속에서 ‘증상’으로 바뀔 테니까.


후인 : 카드 때문에. 응급연락… 그거.

나는 짧게 말했다. 어머니가 아주 짧게 멈췄다.

그 멈춤이 오히려 내 확신을 키웠다. 어머니는 알고 있다.


어머니 : 그런 건 별거 아니야. 도윤 씨가 과장해서 너를 불안하게 만든 거지.

어머니의 말에 도윤이 웃었다. 오늘은 얇지 않은 웃음이었다.


도윤 : 과장이요? 저는 오늘 처음으로 과장 안 했어요.

어머니 : 도윤 씨, 그만해요.

도윤 : 그만하라는 말은 보통… 들키기 싫을 때 하죠.


어머니 눈빛이 차가워졌다. 도윤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숨이 막혔다.

어머니는 단정했고, 도윤은 단정함의 틈을 벌리고 있었다. 나는 그 둘의 언어를 따라가기 벅찼다.

그래서 내 방식으로 말하기로 했다. 짧게. 확실하게.


후인 : 어머니. 서랍에서… ‘가족’이라는 글자 봤어요.

어머니가 내 얼굴을 보며 아주 천천히 말했다.


어머니 : 너는 보면 더 헷갈린다니까.

후인 : 헷갈려도 봐야겠어요. 어머니가 뭘 정리하려는지.


내가 다시 말했다. 어머니 입술이 굳었다.


어머니 : 후인아. 너는 지금 네 치료에 집중하면 돼.

후인 : 치료는 내가 받고 있어요. 그리고 내 삶은… 내가 봐야 하지 않아요?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단단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손이 떨렸다.

도윤이 내 손목을 아주 살짝 잡았다. 붙잡는 게 아니라, ‘여기 있다’고 표시하는 정도로.

어머니는 그 장면을 보더니, 더 단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 도윤 씨는 이제 그만 가요.


도윤은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도윤은 나를 봤다. 내 눈을 똑바로 봤다. 그리고 아주 조용히 물었다.


도윤 : 후인아.
후인 : 응.
도윤 : 네가 말해. 내가 가야 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 하나가 누군가의 자리 하나를 결정할 것이다. 그게 무서웠다.

그런데 더 무서운 건, 내가 지금까지 그런 결정을 ‘못 하게’ 살아왔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결국 말했다.


후인 : 가…지 마.


어머니 얼굴이 굳었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한 말을 이해했다는 듯, 그리고 그 말의 무게까지 받아들인 사람처럼.

하지만 도윤은 그다음 말을 내게가 아니라, 어머니의 공기에게 건넸다.


도윤 : 저, 오늘은 갈게요. 근데 한 가지는 남길게요.


도윤이 소파 밑에서 파일을 꺼냈다. 그리고 내 손에 슬쩍 쥐여줬다.
숨기는 동작이 아니라, 보이게 하는 동작이었다. “숨긴 게 아니다”라는 선언처럼.

어머니의 시선이 파일로 떨어졌다.


어머니 : 그게 뭐에요?

도윤 : 증거요.


그 단어 하나가 거실 공기를 갈랐다. 어머니가 파일을 뺏으려고 한 발 다가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파일을 가슴 쪽으로 끌어안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어머니를 향해 ‘막는’ 자세를 취했다.

기억이 아니라, 본능이 먼저 반응했다. 들키지 말아야 할 건 감정이 아니라 이 증거였다.

어머니가 말했다.

어머니 : 후인아. 너 지금… 누구 편이야?


그 질문이 너무 잔인했다. 편을 고르는 순간, 나는 누군가를 배신하게 된다.
그런데 나는 지금 사랑이 뭔지도 모른다. 내 기억이 지워졌으니까.

내가 아는 건 단 하나, 내 삶이 누군가에게 ‘정리’되고 있다는 것.

나는 숨을 삼키고 말했다.

후인 : 내 편.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오자 도윤이 아주 작게 웃었다. 다행이라는 웃음이 아니라, 이제야 시작이라는 웃음.

어머니는 웃지 않았다. 어머니는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 : 그래. 그럼 네가 감당해.


도윤은 더 말하지 않았다. 도윤은 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가, 아주 낮게 내게 말했다.


도윤 : 들켜도 되는 건 증거뿐이야.


문이 닫혔다. 도윤은 나갔다. 남은 건 나와 어머니, 그리고 내 품의 파일이었다.

그리고 그 밤, 나는 처음으로 내 삶을 ‘읽어야’ 했다. 결론이 아니라, 증거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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