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익숙함은 기억보다 먼저 온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는 현관 앞에 서서 내 길을 막았다. 문 앞에서 단정하게, 단정해서 더 무섭게 말했다.
어머니 : 너 오늘 어디 가지 마.
나는 신발을 신으면서 대답했다.
후인 : 나 잠깐만.
어머니 : 후인아. 너 지금 나랑 이러면… 진짜 힘들어져…
어머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낮아질수록 확정되는 목소리.
후인 : 힘들어지는 건 내가 아닐거야
내 입에서 이런 문장이 나온다는 게 낯설었다. 그런데 한 번 나온 말은 다시 목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 말이 ‘반항’이 아니라 ‘변화’라는 걸 알아챈 사람처럼, 아주 잠깐 표정이 굳었다.
그 굳음은 화가 아니라 계산이었다. 어머니는 늘 계산으로 감정을 덮는다. 어머니는 내 손목을 잡았다.
어머니 : 너는 지금 상태가…
후인 : 어머니, 지금의 내 상태로 제 인생을 잠그지 마세요.
내가 끊었다. 그 말에 어머니 손이 아주 잠깐 느슨해졌다. 동의가 아니라, 순간적인 계산의 실패였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문을 열고 나왔다.
복도 공기가 차가웠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데 손끝이 떨렸다.
떨림은 두려움이기도 했고, 결심이기도 했다.
어젯밤 파일의 종이 모서리가 갈비뼈를 눌렀던 감각이 떠올랐다.
아팠는데, 그 아픔 덕분에 내 말이 진짜였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내일 1202호로 갈 거야."
어머니 앞에서 했던 문장이, 복도 공기 속에서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말은 사라지지 않았다. 말은 가끔 사람보다 오래 남는다.
택시를 타고 주소를 찍었다.
1202호가 있는 건물.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런데 골목을 꺾는 순간, 이상하게도 내 몸이 먼저 반응했다.
여기야.
내 머리는 아니라고 하는데, 몸이 그렇다고 했다. 기억은 늦는데, 감각은 먼저 도착하는 것 같았다.
건물 1층 로비. 벽면 게시판. 우편함. 나는 우편함 앞에서 멈췄다.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후인
그리고 그 아래, 더 작은 글씨.
도윤
두 글자를 보는 순간 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 각서도, 사진도, 서류도 아니었다.
누군가가 여기서 살았다는 흔적. 오늘의 증거가 아니라 생활의 증거. 그게 내 속을 더 정확히 찔렀다.
내가 ‘모르는’ 삶이 아니라, 내가 ‘잃어버린’ 삶이 여기 있었다.
나는 잠깐 우편함에 손을 올렸다.
만져보면 기억이 돌아올 것 같아서가 아니라, 만져야만 내가 여기까지 왔다는 게 믿길 것 같아서.
금속은 차가웠고, 차가운 건 늘 또렷했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12층 버튼을 눌렀다. 손끝이 버튼에 닿는 순간, 내 머릿속에 짧은 장면이 번쩍 지나갔다.
밤. 복도. 도어락. 내 손에 들린 장바구니. 그리고 도윤의 목소리.
도윤 : 후인아, 비 오니까 우산 챙겨.
나는 숨을 멈췄다. 장면은 바로 사라졌다. 그런데 사라지기 전에 남긴 것이 있었다. 우산 손잡이의 차가움.
젖은 바닥의 미끄러움. 도윤 목소리의 온도. 기억이 아니라 감각이 먼저 남아 있었다.
내 머리는 비어 있는데, 손바닥은 이미 알고 있었다.
12층에 도착했다. 복도는 조용했다. 조용해서 내 발소리만 들렸다. 나는 1202호 앞에 섰다.
초인종을 누르려다 멈췄다. 내가 지금 누르는 건 초인종이 아니라, 내 과거의 문일지도 몰라서.
문득 도윤이 말했던 문장이 떠올랐다.
"오늘 밤, 네가 듣는 건 결론이 아니라 증거야."
나는 결론을 원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증거를 하나씩 확인하기로 했다.
그래서 초인종 대신 도어락을 바라봤다. 그리고 놀랍게도, 내 손이 비밀번호를 누르려는 자세를 취했다.
내 몸이 알고 있었다. 나는 손을 뗐다. 아직은… 아직 나는 비밀번호를 누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누르는 순간, 이 집은 ‘증거’가 아니라 ‘확정’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확정은 나를 다시 누군가의 손으로 넘길 수 있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만으로도 누군지 알 것 같은 발소리.
빠르고 일정하고 숨이 살짝 섞인 발소리. 나를 찾는 발소리. 도윤이었다.
도윤은 내 앞에서 멈췄다. 숨이 차 보였다. 그런데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는 눈이었다.
도윤 : 왔네.
후인 : 너… 어떻게 알았어.
내 목소리는 낮았는데, 심장은 너무 컸다.
도윤이 잠깐 웃었다. 웃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도윤 : 결국 올 거라고 생각했어.
도윤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마치 내가 예전에 수없이 들었던 소리처럼. 도윤이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낯선 냄새가 났다. 새로 산 세제 냄새 같은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향수 냄새도 아니었다. 그냥… 살림의 냄새. 공기 속에 쌓인 시간의 냄새. 낯선데도, 내 몸이 먼저 말했다.
집이다.
나는 문턱 앞에서 멈췄다.
들어가면, 나는 오늘부터 ‘확인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억해야 하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 책임이 갑자기 무거워졌다.
도윤이 내 옆에 섰다. 한 발 앞서지 않았다. 나를 끌지도 않았다.
그게 도윤의 방식이었다. 내 선택이 생기도록, 옆에서 멈춰주는 방식.
도윤 : 후인아.
후인 : 응.
도윤 : 오늘은… 결론 만들지 말자.
도윤은 내 얼굴을 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덧붙였다.
도윤 : 오늘은 네가 무너지는 날이 아니라, 네가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었으면 좋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는지, 흔들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익숙함이 기억보다 먼저 왔다. 그리고 그 익숙함은—내가 잃어버린 이름보다 먼저, 내 몸에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