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 케이스

19. 비어 있는 자리도 나를 기억한다.

by NaeilRnC

문을 열자 침실이 나왔다.

침실은 정돈돼 있었다. 너무 정돈돼 있어서, 누군가가 ‘비워두기’ 위해 정돈해둔 것 같았다.

생활의 흔적을 숨기기 위한 정돈. 그런데 숨겨도 남는 흔적이 있다. 흔적은 늘 가장 작은 곳에 남는다.

세면대 쪽 작은 화장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나는 그쪽으로 걸었다.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내가 내 과거를 밟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세면대 위에 칫솔 컵이 있었다. 칫솔이 두 개였다. 하나는 파란색, 하나는 흰색.

그리고 파란색 칫솔 손잡이에—별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현관의 우산과 같은 스티커였다.

나는 그걸 보는 순간,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웃음이 아니라 숨에 가까운 웃음.

별 스티커를 붙이는 방식은 도윤의 방식이다.

분실물에 표시하는 방식. 내가 자주 잃어버리는 것들에 붙여두는 작은 표식.


후인 : 이거…

내가 칫솔을 가리키자 도윤이 뒤에서 말했다.

도윤 : 네 거.

후인 : 왜 별이 붙어 있어?

도윤 : 너는 칫솔도 잘 잃어버리거든.

도윤은 조용히 덧붙였다.

도윤 : 그리고 네가 잃어버리면… 내가 또 찾았지.


나는 칫솔을 손에 들었다. 손잡이가 닳아 있었다. 오래 쓴 물건의 닳음.

그 닳음이 내 손바닥에 익숙하게 걸렸다. 이 칫솔을 내가 잡아본 적이 있다는 뜻이다.

내가 여기서 아침을 맞았다는 뜻이다. 내가 여기서 하루를 시작했다는 뜻이다.

세면대 옆에 작은 약통이 있었다. 날짜가 적힌 약통. 그 옆에는 도윤의 글씨로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후인 - 아침 약 먹고, 물. 물 먼저.’


나는 포스트잇을 떼어냈다. 종이가 얇았다. 얇은데도, 이 종이는 사람을 오래 붙잡는다.

도윤의 노트처럼. 도윤의 규칙처럼.


숨을 들이쉬고 침대 쪽을 봤다. 침대는 퀸 사이즈였다. 이불은 가지런히 접혀 있었고, 베개가 두 개 있었다.

베개도 두 개. 또 두 개.

나는 베개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 아래, 아주 작은 물건이 있었다. 반지 케이스였다.

비어 있는 케이스. 케이스 안쪽은 약간 눌려 있었다. 반지가 들어있던 자리.

손끝이 차가워졌다. 도윤이 내 뒤에서 조용히 말했다.


도윤 : 그거…

도윤은 말을 삼켰다. 삼키는 방식으로 시간을 벌었다.

도윤 : 네가 숨겨놨던 거야.

후인 : 내가?

내 목소리가 떨렸다.

후인 : 왜 숨겨?

도윤이 아주 천천히 말했다.

도윤 : 너는 어떤 날은… 네가 네 삶을 믿지 못했거든.

도윤은 한숨을 쉬었다.

도윤 : 그래서 네가 말했어. “증거는 눈에 보이는 데 두면, 어머니가 치워버릴 수도 있다”고.


그 문장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번쩍하고 장면이 스쳤다. 밤. 침실. 도윤이 울고 있다.

나는 반지 케이스를 쥐고 있다.


"어머니가 보면… 끝이야."


내 목소리였다. 분명 내 목소리였다. 장면은 바로 사라졌다. 그런데 사라지기 전에 남긴 것이 있었다.

반지 케이스의 차가운 플라스틱 감각. 내가 분명히 이걸 쥐어본 적이 있다는 감각.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무너졌다. 몸이 먼저 현실을 인정했다.

나는 여기 살았고, 누군가와 함께 살았고, 그 누군가가 도윤이었다.


도윤이 내 앞에 앉았다.

도윤 : 후인아.

후인 : 괜찮아?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나조차 낯설었다. 괜찮아라고 말하면서, 나는 이미 무너져 있었다.

도윤 : 괜찮아.

후인 : 난 안 괜찮아.


나는 숨을 끊어 말하듯 말했다.

후인 : 나… 내가 내 인생을… 이렇게 모를 수가 있어?


도윤이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도윤 : 너는 모른 게 아니야. 너는… 잃어버린 거야. 그리고 누군가는 그 틈을 이용했지.


그때 도윤의 휴대폰이 울렸다. 도윤이 화면을 보자 얼굴이 굳었다.

후인 : 누구야?

도윤 : 어머니.


내 심장이 내려앉았다. 어머니가 여기로 온다는 뜻이었다. 어머니가 내 과거의 집으로 들어온다는 뜻이었다. 어머니가 내가 찾은 증거들을 ‘정리’하러 온다는 뜻이었다. 도윤은 통화하지 않았다. 대신 내게 말했다.


도윤 : 후인아, 선택해야 해.

후인 : 뭘.

도윤 : 어머니가 오기 전에, 너는 여기서 뭘 할 건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 선택은 이제 ‘안전한 맛’이 아니어야 했다.

내 삶의 증거를 오늘 다시 지울 수는 없었다. 나는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후인 : 어머니가 오면… 내가 직접 말할 거야.


도윤이 내 눈을 똑바로 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 : 좋아. 그럼 오늘은… 네가 증거가 되는 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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