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내가 틀리면, 어머니가 이긴다.
현관 벨이 울렸다. 짧게 한 번. 그리고 조금 더 길게 한 번. 어머니는 늘 그렇게 누른다.
“내가 왔다”가 아니라 “열어”라는 리듬.
도윤은 현관 쪽으로 걸어가며 내게 말했다.
도윤 : 너, 괜찮아?
후인 : 괜찮은 척은 할 수 있어.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 : 그럼 오늘은 척으로 시작해도 돼. 끝은 네가 고르면 되니까.
도윤이 문을 열려는 순간,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후인 : 내가 열게.
내 말은 조용했는데, 내 몸은 이미 결심한 것처럼 움직였다. 도윤이 잠깐 멈췄다가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내게 자리를 내줬다. 도윤은 늘 내게 선택할 자리를 남겨둔다. 어머니는 그 자리를 없애려 한다.
나는 도어락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어머니가 서 있었다. 어머니의 눈빛이 먼저 집 안을 훑었다.
나를 보는 눈이 아니라 ‘정리해야 할 것’을 찾는 눈. 그리고 그 눈이 도윤을 발견하자 표정이 단단해졌다.
어머니 : 여기까지 왔네.
목소리는 차분했다. 차분한 목소리는 늘 결론을 숨긴다.
후인 : 어머니.
내가 말했다.
후인 : 나 여기…
말을 고르다 멈췄다. 결론을 말하면 무너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 어머니가 들어오게 길을 열어줬다.
도윤이 옆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들어오는 순간, 집의 공기가 바뀌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의 생활 공간에 ‘관리자’가 들어오는 느낌.
어머니는 현관에 있는 우산꽂이를 봤다. 별 스티커가 붙은 투명 우산을 봤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는 게 어머니의 방식이다. 봐도 못 본 척하고, 나중에 ‘정리’한다.
거실로 들어오자 어머니는 액자—회색 바다 사진—를 봤다. 잠깐 멈칫했지만 바로 시선을 돌렸다.
그 사진이 내 기억을 건드릴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처럼. 어머니의 시선이 소파 옆 테이블로 떨어졌다.
내가 숨기지 못하게 일부러 올려둔 파일이었다.
어머니 : 그거 뭐야.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후인 : 증거.
어머니가 웃었다. 웃음이 아니라 숨이었다.
어머니 : 증거라는 말은…너 같은 애들이 현실을 못 견딜 때 쓰는 단어야.
너 같은 애들.
그 문장에 속이 뒤집혔다. 병이 있다는 사실이 내 말의 자격을 박탈하는 도구가 되는 순간이었다.
도윤이 앞으로 나서려 했지만, 나는 손을 들어 도윤을 막았다. 내가 말하기로 했으니까.
후인 : 난… 여기서 살았었어?
어머니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어머니 : 살았지. 근데 그건… 잠깐이었어.
후인 : 잠깐.
내가 따라 말했다. 어머니의 눈빛이 더 차가워졌다.
어머니 : 후인아, 장난칠 때가 아니야. 너는 지금 치료가 우선이고, 너는 안정이 우선이야.
후인 : 안정이 뭔데.
내가 물었다.
후인 : 어머니 이름을 적는 거?
어머니 : 그건 네가 선택한 거잖니.
어머니가 말했다.
어머니 : 네가 안전을 선택한 거야.
입술을 깨물었다. 어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내가 선택했다고.
그런데 내가 선택할 수 있도록 정보를 준 적은 없으면서.
후인 : 어머니는 왜 숨겼어. 내가 여기 살았던 걸. 도윤이랑… 뭘 했던 걸. 왜 숨기려고 했어?
어머니는 내 질문의 절반만 답했다.
어머니 : 너를 지키려고.
“지키려고”라는 말이 너무 쉬워서, 나는 더 단단해졌다.
어머니 : 도윤 씨가 너를 망가뜨렸으니까.
도윤이 숨을 삼켰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후인 : 아니. 도윤이가 아니라… 어머니가 지웠잖아.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나도 놀랐다. 내가 어머니를 ‘지우는 사람’으로 규정해버렸다는 사실에.
그런데 어머니는 내 놀람을 이용하려 했다. 바로 공격으로 들어왔다.
어머니 : 후인아. 넌 지금 기억이 불안정해. 그러니까 네가 본 것, 네가 떠올린 것. 그거 다… 틀릴 수 있어.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의 파일을 열었다.
첫 장, 가족관계 서류.
둘째 장, 각서.
셋째 장, 이사 확인서.
나는 서류를 어머니 앞에 밀었다.
후인 : 틀릴 수도 있지. 하지만 이 증거는 뭔데?
나는 손끝으로 도장을 짚었다. 어머니가 서류를 보았다. 보는 순간, 표정이 달라졌다.
더 단정해졌다. 무언가를 결심했다는 얼굴이었다.
어머니 : 그럼 더더욱. 정리해야지.
어머니가 서류를 집어들려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서류를 잡았다. 서류 끝이 찢어질 뻔했다.
종이의 저항이 내 손끝에 느껴졌다. 내 삶의 증거가 찢기는 감각.
후인 : 정리하지 마.
어머니는 내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니 : 너는 왜 이렇게까지 도윤 씨를 감싸?
후인 : 도윤을 감싸는 게 아니야. 내가… 내 인생을 감싸는 거야.
도윤이 조용히 말했다.
도윤 : 후인아, 숨 쉬어.
그제야 내가 숨을 참았다는 걸 알았다. 어머니는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 아주 뜻밖의 말을 했다.
어머니 : 후인아. 너는… 도윤 씨랑 결혼한 게 아니야.
그 문장이 방 안을 쪼개듯 들어왔다. 내가 쥐고 있던 증거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문장.
어머니는 그 충돌을 노렸다. 내가 흔들리면, 그녀의 승리니까.
후인 : 뭐라고?
어머니 : 너희는 결혼한 적 없어. 너는… 착각하고 있어. 도윤 씨가 그렇게 믿게 만든 거야.
머릿속이 하얘졌다. 지금까지 본 모든 증거가 흔들리는 느낌.
내 기억이 불안정하다는 사실이 다시 내 발목을 잡았다.
나는 도윤을 봤다. 도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리고 도윤이 아주 조용히 말했다.
도윤 : 후인아. 어머니가 지금 하는 말… 거짓말이야.
거짓말.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내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나는 기억을 믿을 수 없다.
증거를 믿을 수 없다면, 무엇을 믿어야 하지. 그때 침실 베개 아래, 비어 있던 반지 케이스가 떠올랐다.
종이가 아니라 생활의 흔적. 도장이 아니라 손의 감각. 나는 천천히 말했다.
후인 : 어머니. 그럼… 반지는 뭐였어?
순간 정적. 정적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승리’가 아니라 ‘확인’을 원했다.
증거는 이미 문을 열었다. 이제 남은 건—누가 그 문을 닫으려 하는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