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의 저항

22. 기억은 흐려져도, 손끝은 속이지 않는다.

by NaeilRnC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나는 이상하게 안도했다. 안도라는 감정이 먼저 왔다는 게 이상했다.

결혼이라는 단어는 원래 충격이어야 하는데, 내 몸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반응했다.

충격은 머리에서만 늦게 도착했다. 어머니는 그 장면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어머니 : 봐. 결국 이렇게 된다니까. 네가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하면, 너는 끝까지 끌려가.


끌려간다.
어머니가 내가 살아온 방식을 한 문장으로 규정하는 말. 나는 그 말이 싫어서 손바닥을 펼쳤다.

주먹을 쥐면 어머니가 이긴다. 내가 무너진다. 그러면 어머니는 “봐, 흥분했지”라고 말할 테니까.


후인 : 엄마. 난 지금 끌려가는 거 아니야. 내가 한 걸 확인하는 거야.


어머니는 코웃음을 쳤다.


어머니 : 네가 한 걸 네가 왜 확인해. 네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네가 제일 모르잖아.


도윤이 내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도윤 : 후인아, 하나씩만.

후인 : 뭘.

도윤 : 네가 서명한 날이 있어. 그날을 떠올리면 돼. 결혼이라는 결론 말고.


서명한 날.

그 말이 내 안에서 어떤 문을 두드렸다. 종이 위에 내 이름을 쓰는 감각은, 기억보다 먼저 남는 감각이다.

나는 파일을 다시 펼쳤다. 계약서 사본. 서명란. 내 이름이 또렷했다.

글씨가 내 글씨인지 확인하려고, 나는 손가락으로 글자의 굴곡을 더듬었다.

잉크가 파인 자리를 더듬는 순간, 내 손끝이 종이 밖으로 튀어나가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번쩍. 형광등이 너무 밝은 방. 테이블 위에 종이. 내 손에 쥔 펜.

도윤이 내 옆에 앉아 있고, 내 반대편에는 누군가가 서류를 넘기고 있다.


“여기만 서명하시면 돼요.”


나는 숨을 멈췄다. 장면은 또렷하진 않았다. 인물의 얼굴은 흐릿했다. 하지만 감각은 정확했다.

펜이 종이를 긁을 때의 저항. 손목이 미세하게 떨리는 느낌. 그리고 옆에서 도윤이 내게 말하는 목소리.


"후인아, 괜찮아. 네가 무섭다면… 내가 같이 쓸게."


나는 입술을 떨며 말했다. 지금의 말이면서, 그날의 말 같았다.


후인 : 도윤아. 나… 그날 기억나.


도윤의 눈이 젖었다.


도윤 : 얼마나?

후인 : 완전은 아니고.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후인 : 근데 펜 잡은 감각이… 진짜야.


어머니가 단호하게 끼어들었다.


어머니 : 그런 건 착각이야.


어머니는 내 손을 보며 말했다.


어머니 : 너는 요즘 그런 감각들이 섞여. 네가 본 적 없는 장면도 ‘그럴듯하게’ 만들어내.


그 말이 나를 다시 흔들었다. 어머니의 말에는 항상 내 약점이 섞여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부분,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을 정확히 찌른다.

나는 도윤을 봤다. 도윤은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도윤 : 후인아. 내 손 봐.


도윤이 자기 손을 내 앞에 펼쳤다. 손바닥 중앙에 아주 작은 굳은살이 있었다. 펜 굳은살 같은.


도윤 : 너 그날, 펜 잡다가 손에 힘 너무 줘서 손바닥이 빨갛게 됐어.


도윤이 아주 얕게 웃었다. 억지로 가볍게, 그러나 가볍지 않게.


도윤 : 그래서 내가 네 손 주물러줬고.


그 말이 내 머릿속 장면에 딱 맞아떨어졌다.

형광등 아래, 내 손바닥이 뜨겁고, 도윤의 손이 내 손을 감싸는 감각.

그 감각이 ‘기억’이 아니라 ‘증거’처럼 내 몸에 남아 있었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후인 : 나 너랑 같이… 계약했어.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 : 응. 네 이름으로. 네가 그렇게 하자고 했어.

후인 : 왜? 왜 내가… 내 이름으로 했지?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도윤은 잠깐 숨을 고르고 말했다.

도윤 : 네 어머니 때문이야.


그 말이 너무 단단해서, 나는 오히려 웃음이 나올 뻔했다. 결국 여기까지도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바로 반응했다.


어머니 : 또 내 탓이야? 너희 둘이 그렇게 만들고는.


도윤이 아주 조용히, 그러나 또렷하게 말했다.


도윤 : 어머님은 그때도 지금처럼 말했어요.


도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떨리는 걸 숨기려는 떨림이었다.


도윤 : “도윤 씨, 후인이 불안정한 거 알죠? 후인이를 위한다면… 후인이가 선택할 수 없는 순간이 와도, 후인이를 놓아줘야 한다.”


어머니가 잠깐 멈췄다. 나는 그 멈춤을 봤다. 어머니는 반박하기 전에 늘 멈춘다. 그 멈춤이 사실이다.

나는 어머니를 봤다.


후인 : 엄마, 진짜 그렇게 말했어?


어머니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어머니 : 나는 너를 살리려고 한 거야.

후인 : 그럼 내가 살려면 도윤을 버려야 했어?


내 목소리가 떨렸다.


후인 : 그게 사랑이야?


어머니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어머니 : 사랑? 사랑은 너를 ‘정상적인 삶’으로 돌려놓는 거야. 네가 지금처럼 흔들리지 않게.


어머니는 한 박자 쉬고 덧붙였다.


어머니 : 도윤 씨랑 있으면 너는 계속 흔들려. 너는 계속 네 병을 중심으로 살 거야.


그 문장이 나를 찔렀다. 내 병이 내 삶의 중심이 되는 것. 나는 그게 두려웠다.

어머니는 그 두려움을 이용한다. 도윤이 나를 봤다.


도윤 : 너의 병이 네 삶의 중심이 된 적 있어. 근데 그 중심에서 너를 빼낸 건… 어머니가 아니라 나였어.


내 가슴이 한 번 크게 내려앉았다. 나는 어머니를 향해 말하려다, 말을 멈췄다.

대신 파일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반지가 보이던 사진. 그 사진을 어머니 앞에 놓았다.


후인 : 엄마. 이 사진도 착각이야?


어머니는 사진을 쳐다보지 않았다. 사진을 외면하는 건 인정이다.

어머니는 대신 다른 무기를 꺼냈다. 아주 현실적인, 아주 강력한 무기.


어머니 : 후인아. 너 지금 상태로 여기 있으면 위험해.

후인 : 뭐가 위험해.

어머니 : 너는 오늘 밤 무조건 무너져. 그래서 내가 널 데려갈 거야.


데려간다. 선택이 아니라 이동. 보호가 아니라 강제. 도윤이 바로 말했다.


도윤 : 안 돼.

어머니 : 도윤 씨는 빠져요. 보호자는 나에요.


그때 내 안에서 어떤 문장이 정확하게 떠올랐다. 침실의 반지 케이스를 숨기던 밤, 내가 분명히 말했던 문장.


"어머니가 보면… 끝이야."


나는 어머니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후인 : 엄마. 지금 엄마가 하려는 게… 그 ‘끝’이야.


어머니의 표정이 굳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어머니의 방식이 아닌 내 방식으로 선언했다.


후인 : 나 안 가. 오늘은 여기 있을거야.


말이 끝나자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뛰는 심장이 “살아 있다”는 증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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