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자

21. 관계를 침입으로 바꾸는 법의 언어

by NaeilRnC

“반지는 뭐였어?”


거실이 조용해졌다. 정적은 판단의 시간이다.

어머니는 질문의 위험을 계산하는 사람이고, 도윤은 질문의 의미를 몸으로 아는 사람이다.

나는 둘 사이에서 숨을 삼켰다. 내가 던진 질문이 너무 컸다. 하지만 이미 던져졌다.

어머니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정말 모르는 사람처럼.


어머니 : 반지? 그거 커플링 같은 거였겠지.

도윤 : 어머님, 커플링이 아니잖아요.


도윤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도윤 : 그 반지 케이스, 후인이가 숨겨둔 거예요. 일부러.


어머니가 도윤을 날카롭게 봤다. 그리고 곧 ‘관리 모드’로 들어갔다.

어머니의 말투는 이름을 부르는 순간부터 관리로 바뀐다.


어머니 : 도윤 씨. 당신은 지금 후인이 상태를 이용하고 있어요.

도윤 : 이용한 건 어머님이죠.


도윤이 숨을 들이쉬었다. 도윤은 내 쪽이 아니라 어머니의 시선을 맞받았다.


도윤 : 후인이가 잊을 때마다, 어머님은 그걸 ‘정리할 수 있는 기회’로 보셨잖아요.


어머니의 표정이 더 단정해졌다. 단정함은 어머니가 전투태세에 들어갈 때의 얼굴이다.

어머니는 늘 그래왔듯, 한 단어로 대화를 닫으려 했다.


어머니 : 후인아. 너는 지금 중요한 걸 놓치고 있어. 반지가 있었든 없었든, 그게 너의 ‘회복’에 도움이 되니?


회복. 어머니가 그 단어를 꺼내는 순간, 나는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된다.

치료라는 단어가 내 문장을 증상으로 바꾸는 버튼이 되니까. 나는 어머니를 똑바로 봤다.


후인 : 엄마는 회복이 뭐라고 생각해?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엄마 말만 믿는 게 회복이야?


어머니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말했다.


어머니 : 너는 지금 너무 흥분했어.


흥분. 또 자격 박탈의 단어.
내 감정이 생기면, 어머니는 그 감정을 증상으로 분류한다.

증상으로 분류되는 순간, 나는 내 삶의 당사자가 아니라 관찰 대상이 된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도윤이 옆에서 내 손등을 살짝 눌렀다. 주먹 쥐려는 손을 펴주는 압력.

내가 내가 되도록 붙잡는 방식.


후인 : 흥분해도 돼. 내 인생이니까.


어머니는 한 발 다가와 테이블 위 서류를 다시 보았다. 그리고 손끝으로 각서 부분을 탁 쳤다.


어머니 : 봐. 도윤 씨가 직접 썼잖아. 네 치료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도윤 : 그 각서, 어머님이 “떠날 수 있게 해준다”고 해서 쓴 거잖아요.


도윤이 끊었다. 어머니 눈빛이 차가워졌다.


어머니 : 나는 선택지를 준 거에요.


어머니는 냉정하게 덧붙였다.


어머니 : 도윤 씨가 원했어. 너도 힘들었고.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장면이 번쩍 스쳤다. 불이 꺼진 거실. 종이 한 장. 그리고 어머니의 목소리.


“도윤 씨, 당신이 떠나야 후인이가 살 수 있어. 나중에 후인이가 당신을 원망해도, 그건 당신 몫이야.”


나는 숨을 멈췄다. 장면은 바로 사라졌지만, 어머니의 말투가 남았다.

‘살 수 있어’라는 단정.

‘감당해야 해’라는 명령.

그 말투는 기억이 아니라 공기처럼 몸에 남는다.


후인 : 엄마. 도윤이한테… 떠나야 내가 살 수 있다고 말했어?


어머니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미세함이 내 안에서 확신으로 커졌다.

어머니는 부정하기 전에 늘 잠깐 멈춘다. 그 멈춤이 사실이다.


어머니 : 후인아. 너는 지금 기억이—

후인 : 기억 말고. 엄마가 그렇게 말했어?


내가 끊었다. 어머니는 내 눈을 똑바로 봤다. 그리고 결국 말했다.

어머니 : 그래. 그게 사실이니까.


그 말이 내 가슴을 눌렀다. 도윤이 옆에서 아주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도윤이 상처받는 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도 이상하게 분노가 먼저 올라왔다.

어머니는 너무 당연하게 말했으니까. 사실이라는 말로 사람을 밀어내는 게 너무 쉬워서.


후인 : 엄마는 왜 그렇게 생각해?


어머니는 답을 준비해둔 사람처럼 말했다.


어머니 : 너는 잊어가고 있어. 잊는 사람은, 무언가를 붙잡으면 더 무너져.


그 말이 어느 정도는 그럴듯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어머니의 논리는 늘 일부 진실을 섞는다.

일부 진실이 들어가면, 전체 통제가 합리처럼 보인다. 도윤이 낮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윤 : 어머님, 후인이가 무너지는 건 저 때문이 아니에요. 후인이가 무너지는 건… 후인이 인생을 어머님이 후인이 모르게 만들었기 때문이에요.


어머니가 차갑게 웃었다. 질문처럼 들리지만 규정인 말.


어머니 : 그래서 네가 알려주겠다고? 후인이가 지금 감당할 수 없는 걸?


도윤이 나를 봤다.


도윤 : 후인아. 너, 감당할 수 있어?


그 질문은 또 선택이었다. 나는 침실에서 봤던 두 개를 떠올렸다.

칫솔 두 개. 베개 두 개. 별 스티커. 약 포스트잇. 액자 속 바다. 생활이 남긴 두께.

그리고 반지 케이스의 비어 있는 자리.


후인 : 기억은 아직… 감당하지 못할지도 몰라.


도윤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머니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승리의 입꼬리.

그게 싫어서 나는 바로 말을 이어붙였다.


후인 : 근데 증거는 감당할 수 있어. 내가 여기서 살았다는 증거. 도윤이 내 생활을 알았다는 증거. 엄마가 그걸 숨겼다는 증거.


어머니의 표정이 굳었다.


어머니 : 너 지금 도윤 편을 드는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후인 : 아니. 나는—내 편이야.


말을 끝내자마자 어머니의 시선이 침실 쪽으로 움직였다. 무엇인가를 찾는 사람의 시선. 그제야 깨달았다.

어머니는 반지 그 자체를 찾는 게 아니다. 반지를 없애면 증거가 줄어든다고 믿는 것이다.

증거를 줄이면 내가 다시 흔들릴 거라고 믿는다. 흔들리면, 다시 정리할 수 있으니까.


어머니 : 후인아, 여기서 나가.

후인 : 뭐?

어머니 : 여기는 너한테 위험해. 너는 다시 헷갈릴 거야. 그리고 헷갈리면, 너는 또 무너질 거고.


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어머니는 내 무너짐을 막는 게 아니라, 내 무너짐을 전제로 내 삶을 설계한다.


후인 : 엄마, 헷갈려도… 나는 여기서 헷갈릴 거야.


숨을 고르고, 덧붙였다.


후인 : 엄마가 정리해 둔 세계에서 헷갈리는 것보다, 내가 살았던 곳에서 헷갈리는 게 낫거든.


어머니 얼굴이 완전히 굳었다. 어머니는 조용히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몇 번 누르더니, 아주 차분하게 말했다.


어머니 : 도윤 씨. 이 집 계약자가 누구죠?


계약자.
그 단어가 내 귀를 때렸다. 계약자라는 말은 사랑도, 가족도, 기억도 아닌—법의 언어다.

어머니는 늘 법의 언어를 꺼내서 관계를 재단한다. 종이와 칸과 도장으로 사람을 자른다.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침묵은 대체로 사실이다.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어머니 : 후인아. 계약자가 누구인지 알면, 네가 지금 뭘 착각하고 있는지 바로 알게 돼.


나는 숨을 삼켰다. 또 하나의 칸이 열린다. 나는 도윤을 봤다. 도윤은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다만 아주 조용히 말했다.


도윤 : 후인아. 이건… 어머님이 마지막으로 흔들려고 하는 지점이야.


내 손이 주먹 쥐려 했다. 나는 억지로 손가락을 폈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겠다.

어머니가 휴대폰 화면을 내게 내밀었다. 화면에는 계약 정보가 떠 있었다. 주소, 계약 기간, 계약자 성명.

내 눈이 계약자 칸에 닿는 순간, 숨이 멎었다. 거기에는—내 이름이 있었다.


나는 화면을 다시 봤다. 한 번 더 봤다. 분명히 내 이름이었다. 어머니가 아주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 : 봐. 계약자는 너야.


어머니는 한 박자 쉬고, 그 법의 결론을 관계의 칼로 바꿔 꽂았다.


어머니 : 그러니까 도윤 씨는…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이야.


그 말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나는 오히려 차갑게 정신이 들었다.

계약이라는 단어로 사랑을 침입으로 만드는 방식. 어머니다운 논리.

도윤이 낮게 말했다.


도윤 : 후인아, 계약자가 너였던 건—네가 원했기 때문이야.


나는 화면을 꺼버리고 휴대폰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어머니를 봤다.


후인 : 어머니. 계약자가 내가 맞으면… 더 이상하지 않아?


내 목소리가 이번엔 아주 또렷했다. 어머니가 잠깐 멈췄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후인 : 내가 계약한 집에서, 내가 살았던 걸… 왜 내가 몰라?


어머니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하지 못하는 순간, 어머니의 단정함이 처음으로 깨졌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후인 : 엄마는… 내가 알게 될까 봐, 여기까지 숨겼지.


어머니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아주 낮게 말했다.


어머니 : 후인아. 그럼 이제… 네가 감당해.


그 말은 협박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선언.

어머니가 보호자라는 이름으로 지배하던 세계에서, 내가 빠져나오려면 내가 모든 걸 감당해야 한다는 선언.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도윤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후인 : 도윤아. 내가 이 집을 계약한 이유가 결혼 때문이야?


도윤의 눈이 젖었다. 도윤은 대답 대신, 아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비어 있던 반지 케이스가—내 머리보다 먼저, 내 가슴에 자리를 만들었다.

월, 목,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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